"맥주 2000㏄ 마시다 2000명 증원 루머 도는 판... 정책 거버넌스 붕괴 징표"

입력
2024.08.0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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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점에 선 K의료: ④의정, 갈등 끝내고 관계 재정립을]
국내 1호 보건의료정치학자 정웅기 박사
정부, 믿을 수 있는 의료정책 근거 제시에 실패
의사계는 정책 대안 제시 없이 현상유지 급급
전문가들이 신뢰도 높은 기초자료 생산하고 
이해당사자 자료 기반 논의할 대화기구 필요

편집자주

정부가 필수의료 정책패키지와 의대 증원을 발표하며 의료개혁 기치를 올린 지 6개월. 의대 정원이 내년부터 대폭 늘어나 의사 인력 부족 해소의 전기가 마련됐지만, 전공의와 의대생의 이탈로 촉발된 의료공백은 의료체계를 보다 지속가능하도록 개혁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국내외 의료현장 취재와 전문가 자문을 통해 의료개혁 성공 조건과 보완 과제를 점검한다.

"윤석열 정부 의정 갈등의 특징은 누가, 어떤 경로와 근거로 의대 정원을 늘리자고 했는지 추적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의료 정책은 믿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완전히 실패한 거죠. 의사들도 마찬가지예요. 선제적으로 정책을 제시할 능력이 안 되니까 주야장천 파업하고 반대만 해요. 정책을 논의할 사회적 대화기구가 꼭 필요한 이유죠."

지난달 12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에서 만난 정웅기(43) 박사는 길어지는 의정 갈등 상황에 답답함을 토로했다. 정 박사는 '국내 1호' 보건의료정치학자로 미국 존스홉킨스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의학연구원 연구조교수 등으로 활동했다.

정부의 '의대 2,000명 증원' 발표로 촉발된 이번 사태에서, 보건의료정치학자의 눈에 가장 큰 문제점으로 비친 것은 '보건의료 거버넌스'의 붕괴다. 거버넌스란 정책에 대한 근거 산출과 논의 과정, 정책 결정 절차 등을 종합적으로 포함하는 개념이다. 정 박사는 "한국 보건의료 정책 거버넌스는 완전히 무너진 상태"라고 진단했다.

예를 들어 건강보험 정책을 심의하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는 수가 협상에만 역할이 집중됐다. 주요 보건의료 시책을 심의하는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도 의정 갈등 국면 직전까지만 해도 존재감이 없었다. 실제로 보정심은 2005년 두 차례 회의가 열린 뒤 다음 회의가 13년 만인 2018년에야 열렸을 정도로 유명무실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정 박사는 보건의료 거버넌스 붕괴가 대화와 이해관계 조정 실패로 이어지며 의정 갈등이 반복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윤석열 정부의 의료개혁 정책에 대해선 △시행 과정의 정당성 결여 △출구전략 부재를 핵심 문제로 지목했다. 정 박사는 "정부가 의대 증원의 객관적 근거를 처음부터 제대로 제시하지 않고 증원 숫자부터 얘기한 것은 문제"라며 "오죽하면 '대통령이 맥주 2,000㏄를 마시다가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자고 했다'는 말까지 돌겠나"라고 질타했다. 이어 "구체적 전략이 없는 채로 일단 정책을 발표하고 나니 갈등 장기화 국면에서 출구 전략을 세우기도 어려워졌다"고 꼬집었다.

의사계를 향해서도 정 박사는 날 선 목소리를 냈다. 의사들이 선제적으로 의료 현장의 문제점을 해결할 정책 제안은 하지 않고 '현상 유지'를 목표로 무조건 반대만 했다는 것. 그는 "보건의료 거버넌스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이익집단이 먼저 문제점을 파악하고 합리적 해결책을 제안해야 한다"면서 "한국 의사계는 그럴 능력이 없다. 무조건 반대하고 파업하면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질타했다.

한국 보건의료 거버넌스 회복을 위한 정 박사의 구상은 '보건의료개혁국가위원회' 설치다.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해 의료 정책 논의의 근거 자료를 만드는 기능을 갖춘 사회적 대화기구다. 생산적 정책 수립을 위해서는 모두가 이해하고 논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기초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다. 전문가들이 기초 자료를 만들면 이를 토대로 정부와 의료계, 환자단체, 시민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토론하고 합리적 정책을 도출하는 과정을 통해 거버넌스를 정립할 수 있다고 정 박사는 기대했다. 그는 "객관적 근거를 마련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할 사회적 대화기구가 없다면 의정 갈등 해결은 불가능하다"며 "기구는 대통령 직속 또는 국회 산하에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송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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