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앙정보국(CIA) 출신 한국계 북한 전문가 수미 테리(52)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의 ‘불법 한국 정부 대리’ 사건 파장이 심상치 않다. 이 사건 불똥이 미국 정부 고위 관리를 지낸 또 다른 한국계 인사에게 튄 조짐이 보이는가 하면, 대미 활동을 하는 한국 정보·외교 당국의 허술한 민낯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근거는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혐의로 기소된 테리의 공소장이다. 여기에는 최근 돌연 사임한 정 박(50) 전 미국 국무부 대북고위관리 겸 부차관보와 테리의 친분을 암시하는 문구가 있다. 미 연방검찰 수사가 어떤 식으로든 박 전 부차관보의 사직에 영향을 미친 게 아니냐는 추정이 나온다. 또 박근혜 정부 시절 시작된 테리의 ‘한국 정부 대리인’ 역할이 윤석열 정부 들어서까지 ‘칼럼 로비’ 등으로 계속된 정황도 담겨 있다.
17일(현지시간) 공개된 테리의 공소장에 따르면, 2021년 4월 16일 그는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 국가정보원 요원과 저녁 식사를 했다. 이때 두 사람은 “과거 CIA와 국가정보위원회(NIC)의 고위직을 지냈고, 한국 관련 업무를 맡는 국무부 고위 관리와 테리의 친밀한 관계”를 논의했다. 해당 당국자 실명은 적혀 있지 않다.
그러나 유추는 가능하다. 공소장에 언급된 ‘국무부 고위 관리’의 이력은 박 전 부차관보와 상당히 겹친다. 그는 미 국가정보국(DNI) 산하 NIC에서 한국 담당 부정보관, CIA 동아태 미션센터 국장 등을 지낸 뒤, 잠시 민간 싱크탱크에 몸담았다가 조 바이든 대통령 인수위원회를 거쳐 2021년 1월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로 발탁됐다. 북한 등 한반도 문제도 담당했다.
그런데 이달 5일 갑자기 사임했다. 테리 기소를 앞두고 오해나 의심,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국무부를 떠난 게 아니냐는 추론이 가능한 대목이다. 미 국무부는 이날 한국일보의 서면질의에 “박 전 부차관보는 사적인 삶으로 돌아가기 위해 개인적 결정을 내렸다”고만 답했다.
테리의 활동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예컨대 공소장에는 그가 지난해 3월 7일 윤석열 대통령이 ‘제3자 변제 방식’ 강제동원 배상을 택한 데 대한 글을 써 달라는 요청을 한국 외교부에서 받았다고 기재돼 있다. 그리고 그날 늦게 미 워싱턴포스트(WP)에는 ‘한국이 일본과의 화해를 향해 용감한 발걸음을 내딛는다’라는 제목의 공동 칼럼이 실렸다. 이 글에서 테리는 윤 대통령 결정을 ‘정치적 위험을 감수한 결단’이라고 호평했다.
미 검찰은 해당 칼럼 내용에 대해 “대체로 한국 외교부가 테리에게 제공한 것과 일치한다”고 밝혔다. 일종의 ‘언론 기고문 로비’였다는 뜻이다. 실제로 테리는 외교부 직원에게 “글이 마음에 들었기를 바란다”는 메시지도 보냈다. 공소장에는 또, 문재인 정부 시절 서훈 당시 국정원장이 테리가 주도한 비공개회의에 참석했다는 취지의 내용도 담겨 있다.
데이미언 윌리엄스 뉴욕남부지검장은 이날 “(테리에 대한) 이번 기소는 전문성을 외국 정부에 판매하려는 유혹을 받을 공공정책 종사자들에게 ‘법 준수’라는 메시지를 보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16일 체포된 테리는 이날 보석금 50만 달러(약 6억9,000만 원)를 내고 석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