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여, 내 가슴에!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고등학교 시절, 지금은 과목명이 바뀐 ‘국민윤리’ 시간에 노년의 선생님은 매번 우리에게 위 문구를 외치게 하고는 수업에 들어가셨다. 당시엔 별다른 감흥 없이 반은 장난스럽게 외쳤던 문구가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마음에 조금 와닿는 것 같다. 그중에서도 '우주여, 내 가슴에'라는 구절을 특히 곱씹어 보게 된다.
어릴 때부터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면 우주의 광막(廣漠)함에 어떤 경외심 같은 것을 느끼곤 했고, 그 광대한 우주 앞에 서면 마치 한 점 티끌 같은 인간의 실존에 막막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구절이 아주 실감 나게 다가왔다. '우주는 공간으로 나를 에워싸고 마치 한 점처럼 나를 집어삼키려 한다. 그러나 나는 생각함으로 우주를 포용한다.' 광대한 우주 앞에 선 인간의 연약함과 보잘것없음에 대한 묘사뿐만 아니라 이것을 양말 뒤집듯 뒤집어 이성의 힘으로 우주를 포용하는 인간의 위대함으로 연결하는 반전이 좋아서 이 구절을 암송하곤 했다.
우주의 광대함에 관한 언급 중에 특별히 시선을 끈 것은 다음의 말이었다. "이 드넓은 우주에 우리 지구 생물만 산다면 그건 '엄청난 공간의 낭비(an awful waste of space)'일 것이다."
'코스모스'의 저자인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외계 생명체, 특히 인간에 준하는 지적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확신하며 한 말이라고 하는데, 많은 이도 이와 비슷한 생각인 것 같다. 외계 생명체가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외계 생명체가 존재함을 논증하며 외계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광대한 우주는 엄청난 공간 낭비라는 근거를 드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도 '봄부터 소쩍새'가 울어야 하듯이, 태어난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듯이, 생명체가 태어나고 자라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온 우주에 지구에만 생명체가 있더라도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배경과 조건으로 우주 전체가 필요할 만큼 생명과 인간은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주의 미세조정 가설'이라는 것이 있다. 우주에 생명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특정 물리학의 기본상수들(지구를 예로 들면 지구의 크기, 태양과의 거리, 자전 속도, 물의 양, 지축의 기울기 등)이 매우 좁은 범위 내에 존재해야 하며, 이 기본상수들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생명이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가설이다. 이런 미세조정이 우연히 이루어질 확률은 1/{2×(10의 260제곱)}로서 사실상 '제로'라고 한다.
40년 전 국민윤리 선생님이 '우주여, 내 가슴에'라고 외치게 한 것은 거창한 우주론적 의미가 있었다기보다는 우주도 품을 만큼 크고 넓은 뜻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 원대한 포부를 품으라는 소박한 뜻이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손자뻘인 다음 세대가 뜻과 포부를 가지고 근원적이고 성찰적인 질문을 잊지 않은 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 어떤 우주론보다 심오해 보인다.
그나저나 이제야 그런 선생님의 마음이 헤아려지는 걸 보니 머리에서 가슴에 이르는 길은 우주보다 더 광막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