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국해 영유권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중국과 필리핀이 정상 간 직통망(핫라인)을 개설하기로 했다. 양국 사이의 긴밀하면서도 최고위급 소통 창구를 마련해 해상 분쟁이 파국으로 이어지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17일 필리핀스타 등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필리핀 외교부는 테레사 라자로 차관이 지난 2일 마닐라에서 천샤오둥 중국 외교부 부부장과 만나 ‘해상 통신 메커니즘 개선 협정’을 맺었다고 이날 밝혔다. 남중국해 문제를 논의할 의사 소통 채널을 다양하게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양국은 지난해 1월 남중국해 관련 비상 상황 발생 시 외교 당국자끼리 연락할 수 있는 핫라인을 설치했다. 그간 실무자 중심 소통 창구였는데, 앞으로의 대화 상대는 ‘필리핀·중국 지도자가 지정한 대표’와 외교부 장·차관까지 확대된다. 남중국해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직접 연결되는 대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의미다.
양국은 해양 경비대 간 새로운 의사소통 채널을 구축하는 방안도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린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7일 정례 브리핑에서 “중국은 필리핀과 대화·협상 방식을 통해 해양 문제를 적절히 처리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필리핀과 중국의 고위급 핫라인 개설은 남중국해 갈등이 날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나왔다. 중국은 남중국해에 알파벳 유(U)자 형태 가상의 선(남해구단선)을 긋고 이 안의 90%가 자신의 영해라고 주장해 왔다. 지난해부터는 필리핀 선박을 향해 물대포를 발사하는 등 물리적 충돌도 일으키고 있다.
특히 지난달 중국 해양 경비대가 필리핀 군인들을 칼과 도끼로 위협했고, 보트 충돌 과정에서 필리핀 병사 한 명이 엄지손가락을 잃는 사건도 발생했다. 이처럼 긴장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자 이를 완화하기 위해 ‘핫라인 개설’로 대화 가능성을 넓힌 셈이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중국과 필리핀 대통령실 간 직접적인 소통 채널이 개설되면 남중국해 대립의 걷잡을 수 없는 확대를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짚었다.
다만 회의론도 적지 않다. 2016년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에 소송을 제기해 중국의 영유권 주장이 국제법상 근거가 없다는 판결을 이끌어낸 안토니오 카르피오 전 필리핀 대법원 부장판사는 “필리핀이 연락한다고 중국이 답변할지 미지수”라며 “기적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사건이 발생해도 중국과 대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실제 지난해 8월 남중국해 스플래틀리 군도 세컨드 토머스 암초(중국명 난사군도 런아이자오)에서 중국 해안경비대가 필리핀 선박을 향해 물대포를 발사했을 당시 핫라인은 가동되지 않았다고 필리핀 PNA통신은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