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갓 성인이 된 장모(22)씨는 고향인 전북 전주시를 떠나 대전으로 향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컴퓨터 몇 대만 덩그러니 놓인 썰렁한 오피스텔이었지만, 그는 여기서 자신만의 '제국'을 꿈꿨다. 사업 아이템은 대포계정 유통업. 한 대의 대포폰으로 번호변경·듀얼번호 서비스 등으로 최대 15개의 전화번호를 생성한 뒤 각 번호마다 각종 사회관계망서비스(SNS)·포털사이트·문자대량발송 사이트 계정을 만들 수 있고, 이를 팔아넘기면 '떼 돈'을 벌 수 있다. 범죄 아니냐고? 당연히 그렇다.
장씨는 고향 동갑내기 친구들을 대전의 '사무실'로 끌어들였다. 중간관리책으로 대포계정 조직을 경험했던 친구 A씨를 앉혔고, 그와 함께 대포계정 명의자를 모집하는 텔레그램 채널을 개설했다. "계정 판매 시 당일 정산을 해 준다" "불법이 아니고 피해는 없다"는 등 현란한 홍보글을 올리며 '영업'을 개시하면서 대포계정을 납품할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 조직 등 '거래처'도 뚫었다. 손이 모자라자 군에서 막 제대한 B씨, 대포계좌 모집을 도맡을 C씨도 합류했다. 그렇게 네 사람은 떼돈을 꿈꾸며 '원팀'이 됐다.
20대 초반인 이들은 믿기지 않을 만큼 치밀하고, 대담하게 범행을 전개했다. 몸캠 피싱(신체노출을 촬영하게 하고 돈을 뜯는 수법), 주식리딩방(종목 추천 대화방) 사기, 보이스피싱을 벌이는 조직에 공격적으로 계정을 팔아넘겼다. 팔아넘긴 대포계정들이 범죄에 쓰인다는 건 잘 알고 있었던 탓에, 간혹 언론에 '수사기관이 대포계정 유통 조직 일망타진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나오면 이를 공유하고 2주간 '영업'을 멈추고 '잠수'를 탔다. 그러나 떼돈의 환상은 범행을 멈추게 두지 않았다. 대신 대포계정 명의자들에게 수사기관에서 연락이 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더 철두철미하게 교육했다. '불법 사용은 안 한다'는 홍보는 잊은 지 오래였다.
쏠쏠한 '돈맛'을 본 지 일 년 쯤 지나 꼬리가 밟혔다. 가장 하위 조직원 B씨가 체포된 것. 그러자 총책인 장씨는 대담하게도 B씨가 수감된 의정부경찰서 유치감을 찾아가 "내 얘기를 하지 말라"고 일렀다. 관리책 A씨와 함께 휴대폰을 없앴다. B씨는 대포폰을 개통한 혐의만 적용돼 구속 상태로 검찰에 넘겨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건 기록 어디에도 배후의 존재는 나와있지 않았다.
그렇게 꼬리를 자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장씨는 의정부지검 형사4부(부장 장욱환) 김해슬(38·사법연수원 45기) 검사의 눈썰미는 피하지 못했다. 김 검사는 B씨의 텔레그램 대화 내역에서 미심쩍은 정황을 잡았다. '단독 범행'을 주장하던 그가 매일 실적을 보고하는 상대방이었던 것. '승리'(가칭)라는 닉네임이었다. 총책이 있다는 걸 의심했다.
그새 중간관리책 A씨도 경찰 조사를 받게 됐다. 당초 경찰은 그와 B씨의 범행 기간을 6개월로 특정했지만 검찰은 기간을 더 늘려 살핀 결과 이들이 14개월간 대포계정 3,688개를 판매한 사실이 드러났다. 명의자 대조 작업을 하는 동시에 전국 경찰서에서 보이스피싱 피해 신고 기록도 넘겨 받아 신고된 계정을 일일이 분석했고, 사기 사건에 장씨 일당이 넘긴 계정이 사용된 사실이 파악됐다. 하지만 아직 총책은 베일 속에 감춰져 있었다.
수족 두 명이 붙잡힌 상황에 장씨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감추려 했다. B씨가 의정부교도소에 수감된 후 수 차례 접견을 간 장씨는 텔레그램방에서 쓰던 가명 '승리'를 내세워 남 얘기하듯 B씨를 회유했고 불구속 수사 중이던 A씨의 진술 내용을 전해 입을 맞추려 했다. "걔는 이렇게 말했대. 너는 뭐라고 말했어?라거나 "검찰에서 지금 누구 지목하고 있는 거 같아? 뭐 물어봤어?"라고 물어, 검찰이 '승리'를 겨누고 있는지 누차 확인했다. 더 민감한 이야기는 서신으로 전달하면서 "편지에 썼어. 그대로 해"라며 진술 회유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의 뜻대로 하도록 B씨의 변호사 비용까지 대납해주며 '총책이 누군지 알리지 말라'는 협박도 일삼았다.
결국 검찰은 A씨를 구속하고 장씨를 겨눈 수사망을 좁혀 나갔다. B씨 가족이 장씨를 고발하겠다고 하자 장씨는 B씨에게 "너희 엄마가 '승리'를 자꾸 고발하겠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이것 좀 막아달라"고 종용했다. A씨도 B씨 부모에 "왜 (B씨가) 사실대로 말했냐. 이렇게 말하기로 해놓고"라며 협박 섞인 메시지를 전달했다.
검찰은 A씨와 B씨가 수감된 교도소의 접견 녹음 파일(200쪽 분량 녹취록)을 통해 이런 정황을 확보하고, 두 사람으로부터 총책에 대한 진술을 끌어내기로 했다. 장씨의 실명이 등장한 대화는 수사 기록 어디에도 없고 일당 모두 말을 빙빙 돌려한 탓에, '승리'라는 총책이 장씨일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당 모두 입을 닫는 바람에 지지부진하던 수사는 한 순간에 풀려나갔다. 텔레그램 대화 중 '승리'가 "해외여행 간다. 공항이다"라고 다른 팀원에게 보낸 메시지를 보고 장씨의 출입국 기록을 떼어 보니 동일인물이라는 게 확실해졌다. 이런 증거를 들이밀자 B씨는 결국 전말을 털어놨다.
의정부지검은 5월 말 전기통신사업법 위반 및 사기 방조, 공갈미수 방조 등 혐의로 중간책 A씨를 구속기소한 데 이어 지난달 18일 장씨를 같은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계좌관리책 C씨도 불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 장씨가 꾸린 일당(영업책-중간 관리책-대포계좌 공급책-총책)은 지난해 2월부터 올 4월까지 4억 원대 수익을 올린 것으로 조사됐다.
총책 장씨의 배경도 새롭게 드러났다. 그는 전주 3대 폭력조직 중 하나인 'N파' 출신으로, 경쟁관계에 있던 조직과 패싸움을 한 혐의(폭력행위처벌법 위반)로 과거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기도 했다. 이른바 'MZ조폭'이었다.
장씨 일당에 대한 수사는 계속되고 있다. 그들이 팔아넘긴 수천 개 대포계정이 최근까지도 보이스피싱 등 사기 범행에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에도 사기 피해 5건에 이들이 판매한 계정이 쓰인 것으로 나타나 일당은 추가 기소됐다. 김 검사는 "일당은 도박사이트 운영 등 다른 범행도 준비하려고 했고, 추가로 다른 피싱 조직에도 연락해 '루트'를 뚫으려 준비한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떼돈을 노리고 새로운 범행을 찾아나서던 장씨 일당은 각자의 재판이 병합되면서 나란히 법정에 서게 됐다. 수사 단계에서 범행을 주도한 책임을 두고 장씨와 A씨가 서로에게 떠넘긴 터라, 재판에서도 공방이 벌어질 전망이다. 네 사람의 첫 공판은 23일 의정부지법에서 열린다. 장씨는 재판을 나흘 앞둔 19일 재판부에 첫 반성문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