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주 낙태, 우리가 놓친 것들

입력
2024.07.18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만삭의 배, '이렇게 큰 아이는 지울 수 없다'는 어떤 의사의 말, 얼마 후 복대를 차고 누워있는 산모. 이 여성은 시술을 받고 난 뒤 "무서웠지만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 했다.

36주 태아를 임신 중지(낙태)했다는 한 유튜버는 영상 속에서 정신없이 병원을 찾아 헤맨다. 배 속에서 아이의 숨을 멎게 한 건지, 그야말로 출산 후 떠나보낸 건지,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흘러갔다. 두 해 전 36주 3일 만에 2.6㎏으로 태어나 우렁차게 울어대던 내 아이의 첫날도 떠올랐다.

영상 속 시술이 실제 있었던 일인지부터 따져봐야겠지만, 논란 자체만으로도 적잖은 메시지가 남았다. 먼저, 당장 엄마 배 바깥으로 나와서도 살 수 있었을 36주 아이를 지운 일을 단순 낙태로 봐야 할까.

대법원은 특정 낙태 사례를 살인 행위로 인정하고 있다. 34주 임신부에게 임신 중절 시술을 해줘 2021년 실형을 확정받은 의사 사건이다. 이 의사는 2019년 3월 한 미성년 임신부의 낙태 시술을 의뢰받고 34주 된 태아를 제왕절개 수술을 통해 꺼낸 뒤,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물이 든 양동이에 넣어 살해했다. 의사는 이 수술을 해주는 대가로 2,800만 원을 받았다.

그렇다면 의료진은 어떤 윤리 의식을 갖고 시술에 임한 건가. 이번 브이로그 영상에 구체적인 시술법이 담기진 않았으나, 출산 후 살해하는 방식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의료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이 여성은 시술 비용으로 900만 원을 냈다고 영상에 적었다. 임신부의 딱한 사정을 고려해 준 일이라기엔, 독자 생존이 가능했을 36주 태아를 생각하면 명백히 윤리적 문제가 있는 행위다. 의사단체들마저 "강력한 처벌을 해야 한다"고 분노하고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임신부에게 의료 정보를 제공하고, 안정적으로 출산하도록 적절한 방법을 안내해 준 이는 아무도 없었던 걸까. 아이를 품은 9개월간 다른 선택을 해보겠다는 확신을 주지 못한 제도들이 아쉽다. 임신 초기 정확한 진단과 주변의 조언이 있었더라면 이 일은 애초 발생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출산 후 입양 등 다양한 대안이 있다는 점을 설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낙태죄 폐지 이후 서둘러 입법이 됐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낙태죄가 사라진 이후 벌써 5년이란 시간이 흘렀는데도 어떤 가이드라인도 없다. 정부와 국회가 여러 차례 논의를 시도하고 있으나, 매듭이 지어지지 않는 사이 의료 현장은 혼란해져만 간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의 낙태를 허용할 것인지 같은 기준이 없으니 산모는 갈팡질팡했을 것이다. 명확한 법과 지침이 있었다면 여성과 의료진에게 강력한 경고 신호를 보냈을테고 다른 선택을 만들어냈을지 모른다.

경찰은 이 여성과 병원을 특정하는 수사에 착수했다. 보건당국이 의뢰한 대로 의료진 등에게 살인 혐의를 적용할 수 있을지도 들여다보고 있다. 진위 여부는 수사를 통해 가려지겠지만, 이 사건으로 많은 제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점도 분명해졌다. 그저 논란으로, 개인에 대한 처벌로 흘려보낼 게 아니라 마땅한 재발 방지안을 논의해야 한다.

신지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