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성형 인공지능(AI)이 텍스트나 대화를 넘어 이젠 동영상은 물론 영화 제작까지 시도할 수 있을 정도로 진화했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AI에 이런저런 숏이나 컷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와 함께 카메라 앵글이나 시나리오 용어 등을 써서 입력하면 AI가 수많은 숏이나 컷을 생성해 내고 감독은 그것들을 선택해 편집하는 식이다. 2022년 오픈AI가 대화형 AI ‘챗GPT’를 처음 선보인 지 2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비약적으로 발전한 AI 기술의 현주소다.
지난 2월 아랍에미리트에서 제1회 ‘두바이 국제 AI 영화제’가 열렸다. AI 영화제로선 세계 처음이지만, 세계 각국에서 약 500여 편의 AI 작품들이 출품됐을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기존 영화제작의 핵심 과정인 카메라 촬영을 배제하고, 영상 생성 AI 프로세싱을 통해 모니터에서 컷과 신을 제작한 실험작들이다. 거기에서 우리나라 권한슬 감독이 만든 ‘원 모어 펌킨(One More Pumkin)’이 대상과 관객상 등 2관왕에 올랐다.
아직 독립영화 연출 단계의 청년 예술가이지만, 권 감독은 영상 콘텐츠 분야에서 국내 누구보다도 AI 활용 가능성을 앞서 내다보고, 관련 노하우와 테크닉을 축적해온 선도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비단 실험적인 AI 영화 제작에 그치지 않고, 광고 등 여타 영상 콘텐츠 분야에서 AI를 창의적으로 활용해 수익 비즈니스를 도모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권 감독에게 영화와 영상 콘텐츠 분야에서 AI 활용과 미래 비전 등을 들어 본다.
-영상 생성 AI 솔루션을 활용한 영화 ‘원 모어 펌킨’으로 지난 2월 제1회 두바이 국제 AI 영화제에서 대상과 관객상 2관왕에 올랐다. 어떤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보는가.
“우리는 영상 생성 AI에 작업을 요청할 때 프롬프트에 렌즈 mm 수, 조리갯값, 조명, 심도 등 실제 실사 촬영 때 고려해야 하는 요소들을 모두 입력한다. AI가 영상을 생성하는 데 있어서 감독(AI 유저)의 연출 의도를 최대한 반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AI 기술에만 매몰되지 않고, 영화의 본질인 내러티브와 주제의식에 집중하여 완결성 있는 하나의 단편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한 것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다른 출품작들이 쇼트폼 수준의 시도에 그친 반면, 우리는 주제의식과 기승전결을 갖춘 서사구조를 구축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실제 ‘반지의 제왕’, ‘호빗’ 등 대작 판타지 영화들의 특수영상(VFX)을 작업한 글로벌 스튜디오 WETA의 리처드 테일러 CEO로부터 가장 완벽한 AI 영화라는 평을 들었다. 그래도 ‘원 모어 펌킨’은 벌써 반년 전 이야기고, 지금은 더욱 훌륭한 AI 영화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영화감독으로서 ‘원 모어 펌킨’의 영화적 완성도를 평가한다면.
“보통 영화라고 하면 극영화를 염두에 두는 건데, 그렇게 본다면 AI 생성 동영상으로만 제작된 ‘원 모어 펌킨’은 아직 여러모로 상업적 극영화랑 비교할 수준이 안 된다. 서사적 완결성이나 극적 구성, 주인공 캐릭터 등 예술성이나 완성도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아직 걸음마 수준의 개발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AI 영화로서도 1년 전에 만든 것이라 지금 기준으로 보면 미흡한 점이 많다. 캐릭터들의 동작은 왠지 만화영화처럼 미세하게 지체되는 느낌이 있고, 인물 등도 실사라기보다는 그래픽 같은 느낌이 없지 않다. 요즘 나오는 AI 솔루션들은 ‘원 모어 펌킨’ 제작 당시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진화했다. 다만 ‘원 모어 펌킨’이 AI가 실제 영화 제작에 점점 더 많이 활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해준 건 맞다. 급속 진화 중인 영상 생성 AI는 그런 가능성을 아주 빠른 속도로 실현하면서 전통적 영화 제작과정을 대체해 나갈 것이다.”
-영화나 영상 관련 생성형 AI 솔루션이 잇달아 등장하고, 글로벌 현장에서도 적용이 확산되고 있다고 본다. 주목되는 솔루션은 무엇이며, 글로벌 영화계에서 활용 상황은 어떤가.
“아직까지는 영화계에서 실질적으로 활용되는 사례는 거의 없다. 그러나 곧 여러 시도들이 있을 것으로 본다. 최근 런웨이(Runway)가 기존 솔루션을 개량해 내놓은 젠3(Gen-3)나, 또 다른 동영상 생성 AI 서비스 기업인 루마(Luma) AI가 내놓은 드림머신(Dream Machine) 등은 훌륭한 비디오AI 솔루션들이다. 하지만 최고의 관심사는 역시 오픈AI의 ‘소라(SORA)’이다. 오픈AI는 당분간 소라 출시를 늦출 걸로 알려지는데, 딥페이크 등 악용 가능성이나 저작권 문제 등과 관련된 최소한의 법규 정비를 기다리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최근 선보인 데모 수준만 해도 생성된 동영상이 정말 실사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퀄리티를 보여줬다. 소라가 출시되면 게임체인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AI로 동영상을 손쉽게 만드는 세상이 머지않아 펼쳐질 것이다.”
-영화제작에 생성형 AI를 활용하게 된 건 언제부턴가. 계기는.
“작년 8월 처음으로 생성형 AI를 활용해서 프리비즈 콘셉트 티저(영화 및 드라마 IP의 가능성을 체크해 보기 위한 사전 시각화 작업) 제작을 시도했었다. 언젠가는 컴퓨터 앞에서 영상을 만드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는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비디오 AI 기술의 등장 소식을 접하자마자 곧바로 ‘스튜디오 프리윌루전’이라는 스타트업을 창업하고 이 분야에 주력하게 됐다.”
-‘원 모어 펌킨’ 외에 제작한 AI 영화들이 더 있나. 작품 활동을 계속하면서 제작 노하우가 발전하고 있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요즘 AI 광고 제작 프로젝트들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첫 포문은 글로벌 광고대행사 이노션과 함께한 현대자동차 AI 쇼트필름 광고를 제작한 것이다. 그걸 계기로 많은 러브콜을 받고 있고,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내러티브가 있는 AI 동영상 광고 콘텐츠를 제작한 선례를 남겼다. 지난주 끝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공식 트레일러 ID필름도 제작했는데, 여기서 중요시 여긴 건 메시지였다. 결국 작품은 노하우보다는 메시지가 중요하다.
제작 노하우라는 것은 결국 AI가 시장성 있는 영역에 활용될 수 있는 부분을 잘 포착해내고 연출을 고도화하는 쪽으로 쌓이고 있다고 본다.”
-기존 영화와 AI를 활용하는 영화 간 제작 프로세스에 차이점이 있다면. 영상 생성 AI 활용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적 요소는.
“카메라로 영상을 찍느냐, AI로 영상을 생성하느냐 즉 도구의 차이다. 카메라로 찍는 영상은 어떤 식으로든 실재하는 대상이나 대상 대체물이 있지만, AI 영상은 실재하지 않는 영상을 AI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만들어진 영상들 중 어떤 컷을 사용할지가 결국 감독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세스에서 도구만 달라질 뿐 사람이 영상을 선택하는 롤은 변하지 않는다. 도구가 달라지기 때문에 촬영 콘티 대신 AI 영상 생성 지시문을 준비해야 하고, 그게 시나리오 문법과 적지 않은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직 정확한 카메라 워크의 효과를 내거나 배우처럼 캐릭터를 갖춘 일관된 등장인물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AI 영상 생성이 기존 방식 대비 시간과 비용을 크게 절감 할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은 그동안 영화에서 다양하게 접목돼 왔다. 생성형 AI의 등장과 적용의 영화사적 의의를 말씀한다면.
“AI가 중요한 게 아니라, AI로 만든 영화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 어떠한 내용의 영화인가 등 본질이 중요하다고 본다. 처음 컴퓨터그래픽(CG)이 영화에 도입되었을 때 어떻게 컴퓨터로 그려낸 가공의 오브제가 실사촬영으로 찍은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가 논쟁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아바타 같은 영화를 통해 우리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선례를 본 것 처럼, AI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선도적 활용자로서 현재 영상 생성 AI의 발전 양상을 ‘원 모어 펌킨’을 제작한 지난해와 현재로 비교하고, 향후 전망을 반영해 평가해달라.
“작년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오픈AI의 소라는 미래를 보여줬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 이젠 누구나 AI를 활용해 영상을 제작할 수 있는 서비스들도 많아졌다. ‘원 모어 펌킨’을 만들 때는 지금처럼 활용할 수 있는 툴이 많지는 않았다. 텍스트-이미지 전환 오픈소스 툴인 ‘스테이블 디퓨전(Stable Diffusion)’과 ‘피카(Pikaㆍ그때 당시 베타)’를 사용했다. ‘미드저니(Midjourney) 같은 툴도 있긴 했지만, 검열이 있어서 ‘원 모어 펌킨’에서 보여주는 그로테스크하고 잔혹한 비주얼을 생성할 수가 없었다. 스테이블 디퓨전은 오픈되어 있는 AI모델이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가 있었다. 앞으로는 AI비디오의 품질 향상, 일관성 개선 등의 현재 한계를 극복하는 쪽으로 기술이 발전될 것 같다.”
-지난해 AI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는 스타트업 ‘스튜디오 프리윌루전’을 설립했다. AI 영상 콘텐츠 시장 평가와 전망은.
“AI에 대한 적극성 측면에서 보면 현재 글로벌 콘텐츠 업계 대비 K콘텐츠 업계가 저조한 편이다. 이는 현재 콘텐츠 제작을 하기 위한 생성형 AI 서비스가 한국인들이 활용하기 불편한 점이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활용에 대한 정보가 대부분 해외 정보들이 다수이고,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가이드가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 스튜디오 프리윌루전에서는 현재 AI 정보 포털 플랫폼 ‘에이아이 카이브(AI-Kive)’를 서비스 준비 중에 있다. AI 위키와 AI 커뮤니티를 구축하여 개인맞춤형으로 필요한 AI 서비스 및 활용방안을 가이드해주고, 국내 AI 콘텐츠 활성화를 촉진할 수 있으면 좋겠다.
AI 영상 콘텐츠 시장은 우리가 현대차 CF 영상을 제작한 것처럼 점차 열릴 것이고, 기존의 모든 영상 콘텐츠 시장으로 확장될 것이다. 다만 그 속도는 AI와 하드웨어 발전 속도에 맞춰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본다.”
-영상 생성 AI 솔루션이 보편화할 경우 예상되는 부작용도 있을 것 같다.
“빠르게 법률과 제도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창작자는 기준과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그 안에서 안전하고 창의적으로 창작활동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 AI 영상 기술의 발전이 정말 놀랍도록 빠르고, 실제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가 될 것이기 때문에 범죄에 활용되는 걸 방지하는 방안들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