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영광 재현 나선 미국 경제...변수는 정치

입력
2024.07.16 04:30
25면
<18>미국의 골디락스, 어떻게 시작됐나
저렴한 인건비, 소비 열풍에 90년대 급성장
IT 거품 붕괴 후 침체 겪던 美 경제
AI 열풍과 제조업 투자 붐에 부활 
트럼프 정책, 인플레↑ 관세 장벽 우려

편집자주

국내 대표 이코노미스트인 홍춘욱 프리즘투자자문 대표가 세계 경제의 흐름과 현안을 진단하는 ‘홍춘욱의 경제 지평선’을 2주에 1회 연재합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즐겨 읽던 영국의 동화 ‘곰 세 마리’에는 골디락스라는 금발 머리 소녀가 등장한다. 골디락스는 숲속을 탐험하다가 곰 세 마리가 살고 있는 집을 발견한다. 집 식탁에 수프가 3개 놓여 있었는데, 첫 번째 수프는 너무 차고 두 번째 수프는 너무 뜨거워 먹을 수 없었지만 마지막 세 번째 수프가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세 번째 수프가 ‘골디락스’의 어원이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수프처럼, 경기는 좋으면서 물가 상승이 억제된 상태를 뜻한다. 골디락스 경제를 달성한 유일한 미국의 중앙은행장은 앨런 그린스펀뿐이었다. 1991~2000년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평균 2.7%에 불과했고 실질 경제성장률은 3.4%를 기록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최근 미국 경제는 1990년대를 연상시키는 경제 흐름을 지속하고 있다. 2024년 6월 비농업 부문 신규 고용은 20만6,000명 늘어났지만,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단 3.0%에 그쳤다. 영광의 1990년대를 재현하는 듯한 미국 경제의 호황이 출현한 배경을 살펴보자.

1990년대 미국 경제의 호황은 걸프전에서 시작됐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이후 5개월 뒤에 벌어진 ‘사막의 폭풍' 작전은 미국의 군사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생생하게 보여줬다. 정밀하게 목표를 타격하는 순항미사일로 이라크의 방공망은 한순간에 무력화했고, 자랑하던 소련제 전차부대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녹아버렸다. 걸프전에서 사용된 반도체 기반의 유도 시스템 미사일은 여섯 배 이상 정확한 것으로 판명됐다.

미국이 이라크의 공화국 수비대를 무너뜨리던 1991년 8월 8일, 소련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개혁·개방정책을 주도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과 전략무기 감축 협정을 맺은 후 크림반도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틈을 타 보수파가 군대를 동원해 그를 체포했던 것이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로 자칭한 쿠데타 세력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건강상의 이유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며, 겐나디 야나예프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한다고 발표했다.

쿠데타로 공산당의 억압통치가 재개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 보리스 옐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이 등장했다. 그는 쿠데타를 강력하게 비난하며 전 소련 국민에게 총파업할 것을 촉구하고, 서방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모스크바 시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광장을 가득 메웠다. 일부 군부대가 옐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총부리를 쿠데타 세력에 돌림으로써 승부가 결정됐다.

1990~1991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군수 부문에서 개발된 기술이 민간으로 이전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거대 반도체 장비회사 ASML이었다. 요즘 삼성전자나 인텔, TSMC 같은 거대 반도체 회사는 ASML에서 만드는 극자외선 노광장비를 먼저 사들이기 위해 수년 전부터 줄을 서야 한다. ASML이 다른 경쟁자들이 따라오기 힘든 최첨단 장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네덜란드라는 일종의 중립 지대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무시할 수 없는 경쟁자로 부상한 일본의 니콘이나 캐논이 기술을 독점할 수 없도록 유럽의 네덜란드에 위치한 ASML에 주문을 몰아주고 기술을 이전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또 다른 변화가 출현했다. 동유럽과 독립국가연합(구 소련 국가)의 인재가 서구 국가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선진국 기업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가장 비용이 싼 곳에 주문을 넣기 시작했다. 이 결과, 이른바 신경제 혁명이 출현했다. 아래 <표>는 미국의 노동생산성과 실질임금의 관계를 보여주는데, 노란 박스로 표시된 부분이 1990년대에 해당된다. 근로자 1인당 생산량을 측정한 노동생산성이 1990년대에 폭발적으로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같은 기간 실질임금은 제자리걸음에 그쳤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된 데다, 중국으로의 생산설비 이전이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시장의 황금기 출현으로 이어졌다. 임금인상이 억제되는 가운데 인플레이션 위험이 감퇴됐고, 전 세계의 소비자들이 개인용 컴퓨터와 이동용단말기를 구입하기 위해 줄을 서며 경제성장이 촉진됐다. 가장 이득을 본 곳은 기업이었다. 저렴한 인건비와 강력한 소비를 등에 업고 기업실적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특히 정보기술(IT) 기업으로 구성된 나스닥100지수는 1989년 말 223.8포인트에서 2000년 2월 4,266.9포인트로 20배 가까이 상승했다.

2000년 정보기술 거품 붕괴 이후 20년 동안 미국 경제는 길고 긴 침체를 겪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1%에 그쳤지만, 경제성장률(1.8%)도 반토막 났던 것이다. 강력한 경쟁자 중국이 천안문 학살의 후유증을 딛고 가파르게 성장하면서 세계 국내총생산(GDP) 1위 자리까지 빼앗길 것이란 우려마저 도처에서 제기됐다.

그러나 2021년 이후 전세가 역전돼 미국은 물론 일본마저 중국의 명목 경제성장률을 넘어서고 있다. 어떻게 미국은 부활의 뱃고동을 울리게 되었을까?

가장 유력한 설명은 인공지능(AI) 붐에서 찾을 수 있다. 2022년 챗GPT 출시 이후 불어닥친 AI 열풍에서 미국이 가장 앞서간다는 것에 반대의견을 가지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챗GPT뿐만 아니라 마이크로소프트의 코파일럿, 구글의 제미나이 등 기술혁신을 주도하는 기업들이 모두 미국에 있을 뿐만 아니라 엔비디아 등 AI 반도체 부문에서도 따라올 국가를 찾기 힘들다. 지난해 미국의 AI 관련 투자액(874억 달러)은 전 세계 투자액의 62%에 달한다.

AI 열풍 못지않게 제조업 투자 붐도 중요한 요인이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고율의 대중 관세를 부과한 데 이어, 조 바이든 행정부가 반도체법과 인플레감축법을 제정해 미국으로의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치한 것이 경제 성장의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래 <표>는 미국의 제조업 공장 건설투자 변화를 보여주는데, 바이든 행정부 들어 3배 늘어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공장용 건설투자 증가는 관련 설비 주문으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강력한 고용 증가를 유발한다. 최근 텍사스와 애리조나를 비롯한 남서 국경지역으로 대규모 이민이 발생하는 것도 그곳에 좋은 일자리가 많이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분석을 요약할 때, 미국 경제가 1990년대의 영광을 재현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AI 혁신이 가파른 속도로 진행되는 데다, 미국으로의 글로벌 기업 투자 붐이 일거에 꺾일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독자들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가장 큰 위험 요인은 정치에 있다. 2024년 말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가 당선될 경우, 그가 추진할 것으로 예상되는 정책이 많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는 10%의 관세를 일률적으로 부과하는 한편, 바이든 행정부가 제정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대체하는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킬 것이라고 공언하고 있다. 이는 외국인 직접투자를 위축시킬 수 있으며, 경제 전반의 인플레를 높일 것으로 우려된다. 특히 2017~2020년의 트럼프 1기와 달리, 트럼프 행정부가 신속하게 구성되고 또 강한 추진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는 면에서 그 이상의 위험이 현실화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국 입장에서, 미국의 정치지형 변화 가능성을 면밀히 관측하고 신속하게 대응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한다. 투자자들은 달러는 물론 금이나 부동산 등 다양한 종류의 자산에 대한 분산 투자 전략을 실행하는 것을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