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 사건으로 한국 산업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을 하나 꼽으라면 일본의 '한국 화이트리스트 배제'다. 반도체 소재를 공급해주던 친구가 하루아침에 적으로 돌아서 공격했다. 일본 측의 일방적 조치에 한국 정부와 기업들은 대응하느라 정신 없었고 시간이 흘러 정권이 바뀌면서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 다시 올렸다.
이 과정에서 빠진 게 있다. 당시 일본은 왜, 어떻게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하게 됐는지 앞으로 산업계를 중심에 둔 한일 관계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짚어보는 시도는 없었다. 사실상 '잊힌 전쟁'이 돼버린 수준이다. 한국일보는 창간 70주년을 맞아 화이트리스트 배제 당시와 그 이후 상황을 살펴 한일 관계에 대한 시사점을 얻어보려 한다.
2019년 더운 여름,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뺐다. 안보 측면에서 신뢰하기 때문에 군사 및 대량살상무기 전용 가능성이 있는 수출 품목에 대한 규제를 '면제'해주는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2004년부터 화이트리스트 국가로서 '믿는 친구' 였던 한국을 내친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일본은 "한국이 재래식 무기와 관련해 충분히 통제하지 않아 관련 제도를 신뢰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일본에서 수출되는 품목 일부가 적대국으로 흘러가 무기화될 수 있는 개연성이 있는데 한국 정부가 손 놓고 있다는 뜻이었다. 한국 정부는 근거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일본이 수출 규제에 나선 진짜 이유는 화이트리스트 배제 전인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었다. 이를 진두지휘한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속내를 털어놨다. 아베 전 총리는 "(일본) 정부로서는 수출 관리 엄격화와 징용공 문제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라는 입장을 취했다. 다만 저는 '국가와 국가 간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무역 관리는 당연하다'고도 했다"며 "굳이 두 문제(화이트리스트 배제와 대법원 강제징용 배상 판결)가 연결된 것처럼 보인 것은 한국이 징용공 출신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아베 전 총리는 끝까지 '연결된 것처럼 보이게'가 아니라 '연결된 것처럼 보인 것'이라고 의도성을 모호하게 표현했지만 결국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수출 규제 보복의 원인이라고 퇴임 이후에야 인정한 것이다.
일본의 수출 규제 보복은 '경제적 강압'에 해당한다. 경제적 강압은 강대국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약소국에게 경제적 수단을 사용해 압박하는 경우다. 실제 일본 자유민주당 내에선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불만과 함께 경제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이어졌다. 2019년 1월 대표적 극우 정치인 아카이케 마사아키 당시 참의원은 "경제 제재를 구체적으로 금방 가능한 것부터 해야 한다"며 "반도체 제조에 쓰이는 불화수소 등 전략 물자를 정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 극우 정치의 상징인 아베 전 총리 입장에선 당내 강경한 목소리를 무시하기 어려웠고 하락세였던 지지율도 끌어올려야 했다.
경제적 강압이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은 크게 두 가지다. ①친한 친구를 쳐라 ②상대방의 기회비용이 큰 것을 이용해라. 이 조건에 따라 일본이 수출 규제를 적용한 품목은 세 가지다.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불화폴리이미드다. 모두 한국이 주 먹거리로 삼고 있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다. 해당 소재들은 일본 기업들이 세계 시장 점유율의 80~90%를 차지하고 있고 특히 포토레지스트는 한국의 대일 수입이 93%일 정도로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다. 즉, 일본은 자신들에게서 제때 소재를 수입하지 못하면 '친한 친구' 한국의 기업들이 치러야 할 기회비용이 상당히 큰 것만 골라 잡았다는 얘기다.
아베 전 총리는 이 아이디어를 낸 경제산업성 출신 공무원들을 추켜세워주기도 한다. 자서전에서 그는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배제와 관련해 "경제산업성 출신 이마이 나오야 정무비서관과 하세가와 에이이치 총리 보좌관이 관여했다"며 "이런 방법을 생각해 낸 이마이와 하세가와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한국 화이트리스트 배제는 성공한 것일까. 경제적 강압의 성공 조건 두 가지에 하나를 추가하면 '달성 가능한 작은 목표를 세우라'는 것이다. 아베 전 총리가 국내에서의 입지 강화와 한국 대법원 강제징용 배상 판결 실행의 지연을 목표로 삼았다면 '성공했다'고 평가하는 게 맞다.
아베 전 총리 지지층은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배제에 찬성한다는 의견이 81%(산케이신문 여론조사)가 나올 정도로 내부 결집 효과가 있었다. 여기에 한국 대법원에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나온 뒤 배상을 위한 일본제철, 미쓰비시의 한국 내 재산의 현금화 작업 명령은 대법원에서 별도로 진행해야 했는데 차일피일 미뤄지다 2023년에야 확정됐다. 그사이 화이트리스트 배제가 있었고 이를 두고 "대법원이 한일 관계가 다시 악화할 수 있다는 염려에 외교적 고려를 하다 시기가 늦어졌다"는 평가가 한국 법조계에서 나왔다.
그런데 일본은 '작은 성공'을 위해서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비용'을 지불했다.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자유무역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국제 분업' 체계가 깨지면서 한국 반도체 기업이 일본 소재 기업의 '큰손'이었다는 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일본 소재 기업들은 아예 한국 반도체 기업에 신속한 소재 제공을 위해서 한국 법인을 만들어 영업해왔다. 포토레지스트를 생산하는 신에츠는 한국신에츠실리콘(신에츠 100%), 도쿄오카공업(TOK)은 TOK첨단재료(TOK 90% + 삼성물산 10%), 스미토모화학은 동우화인켐(스미토모 100%)을 두고 있었다. 히타치제작소에서 반도체 산업 부분 수장을 지낸 마키모토 쓰기오는 "한국은 효율적으로 반도체 산업을 이끌어가기 위해 소재를 직접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며 "과거에는 일본 소재 기업도 국내에서 팔리지 않으면 무너져 버렸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한국에 팔러 갔다"고 했다.
이런 국제 분업 체계가 무너지면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에 불화수소를 제공하던 모리타화학공업은 규제 개시 첫해 순이익이 직전 연도 대비 90%나 감소했다. 이 회사의 불화수소 수출량은 한국 시장이 90% 이상을 차지했는데 딱 그만큼 줄어든 것이다. 당시 상황을 잘 아는 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화이트리스트 배제 이후에 일본 내에선 소재 기업 한두 곳이 아예 부도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한국 기업들이 이젠 더 이상 과거처럼 일본에만 의지하지 않는 점도 일본 입장에선 예상치 못한 타격이다. 전통적 국제 분업 체계가 무너지는 경험은 한국 기업인들에게 불안함을 심어줬다. 당시 삼성전자가 일본 의존도가 높은 소재·부품 약 220개를 골라 공급처를 일본 외 지역으로 전환하는 대책을 추진했고 현재도 삼성전자는 일본 소재 및 부품 의존도를 이전보다 낮은 수준으로 유지 중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본 기업에 밀렸던 외국 기업들이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새로운 공급처가 되려 해 한국 기업들 입장에선 선택지가 늘어났다. 미국 화학 소재기업 듀폰이 대표적이다. 듀폰은 포토레지스트를 생산하는데 과거 한국에 진출했지만 일본 기업에 밀렸다. 화이트리스트 배제 이후 다시 한국 시장으로 돌아와 2,800만 달러를 투자해 충남 천안시에 공장을 지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제 일본과의 밸류체인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불안정한 관계가 됐다"며 "실제로 반도체 기업들은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경영 방식을 1순위로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한국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충분히 구매선을 바꿀 수 있는 기초 체력이 있다는 점도 이번 기회에 알게 됐다"며 "꾸준히 수입선을 늘려서 안정적으로 소재, 부품을 수급하려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일본은 대법원 강제징용 판결 실행 지연이 목표였기 때문에 일본 극우 정치인들에서는 이에 만족하고 있었다. 여기에 일본 기업들의 아우성이 이어지면서 야금야금 수출 규제 강도를 낮췄다. 일부 일본 기업의 수출길을 계속 열어주는 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문재인 정권에서 윤석열 정권으로 바뀌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시작한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 대책(매년 1조 원 규모의 예산을 확보, 세 가지 주요 소재 품목을 포함한 20개 품목을 1년 이내에, 80개 품목을 5년 이내에 국산화하거나 일본 외 지역에서 확보한다는 목표)은 윤석열 정부에서도 소재와 부품 등의 국산화율을 2022년 30%에서 2030년까지 50%로 높이겠다는 목표로 비슷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다만 정부 차원에서 화이트리스트 배제가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 정확히 분석하고 대응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는 대신 일본과의 관계를 유화 국면으로 끌고 갔고 지난해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국가로 되돌려 놓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옆집 친한 친구의 약점을 파고드는 전략이 수시로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일본에 대한 비전략 민감 물자 의존도는 여전히 높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약점이 아예 없는 게 아니다. 홍지상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연구위원은 "여전히 일본과 밸류체인으로 긴밀하게 엮어 있다"며 "화이트리스트 배제 이후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자국 중심주의가 더욱 강해지고 있는데 일본은 이런 국면에서 자신들의 이익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방심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라인 사태만 봐도 일본은 언제나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국가인 점을 알 수 있다. 일본은 화이트리스트 배제 때도 일본이 수출 품목이 위험한 제3국에 흘러가고 있다고 주장했듯 라인의 경우에도 정보 유출 사태의 책임이 한국에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은 단순히 라인이 '어느 나라 기업'이냐는 측면이 아니라 자국의 정부 민간 서비스와 국민들이 의존하는 라인의 시스템과 정보를 한국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환경에 제동을 건 것이다.
김양희 대구대 경제금융학과 교수는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에 양국 개인 정보위 합동 조사로 유출의 경위를 함께 따져보자는 식으로 대응해 주장의 진위를 정확히 파악하는 시도도 해볼 수 있다"며 "일본의 행동에 깔려 있는 기본 전제부터 같이 들여다보고 논의할 수 있는 긴장감 있는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럴 때일수록 일본은 '가까이' 둘 필요가 있다는 게 전문가의 조언이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가까이와 친하게의 개념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며 "가까이 두라는 것은 곁에서 주도면밀하게 정보를 파악하고 행동양식을 분석하고 예측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화이트리스트 배제로 한국이 큰손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며 "앞으로 산업계를 중심으로 한일 관계를 맺을 때의 핵심은 일본을 상대로 우리가 불리하거나 필요할 때 정당한 요구를 할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느냐, 어디까지 양보를 이끌어낼 수 있느냐"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