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도 바지를 다려 입는다

입력
2024.07.1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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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을 묘사할 때 반드시 적나라해질 필요는 없다.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이야기다. 영화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재현한다. 고통을 보여주지 않아서 더 고통스럽게 하는 방식이다.

첫 장면은 에어비앤비 광고 세트장인가 싶은 주택의 초록빛 정원. 실존 인물인 루돌프 회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장 부부의 사택이다. 집과 수용소를 분리하는 건 높지도 않은 벽돌 담장뿐.

부부와 다섯 자녀는 담장 ‘저쪽’이 없다는 듯이 산다. 꽃과 나무를 가꾸고, 물놀이를 하고, 생일을 축하하고, 파티를 열고, 반려견을 쓰다듬고, 여행 계획을 세우고, 은퇴 후의 미래를 설계한다. 딸의 집을 처음 방문한 루돌프의 장모는 “낙원 같다”고 감격한다.

‘이쪽’의 삶이 얼마나 안락한가를 보여주는 건 얼룩도, 주름도 없는 루돌프의 새하얀 재킷과 바지다. 유대인 100만 명의 학살을 기획·집행한 그는 피칠갑을 한 악마의 모습이 아니다. 밤마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아내의 기분을 맞춰 주는 말쑥한 생활인이다.

홀로코스트 영화이지만 죽은 사람은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저쪽’에서 벌어지는 참혹을 소리로만 전한다. 울부짖는 소리, 끌려가는 소리, 신음하는 소리, 고문당하는 소리, 총살당하는 소리, 그리고 가스실에서 나온 시체를 때려 넣고 태우는 소각로의 “웅웅웅웅” 하는 소리. 이 모든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는다.

루돌프와 가족은 그러나 귀를 막는 법이 없다. 담장 너머의 소리가 명백하게 가리키는 고통과 체념에 마음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삶의 아름다움만 취한다. 소리가 들리려고 하면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떨쳐낸다. 듣지 않아서 그들은 행복하다.

이런 설정의 목적은 과거의 가해자들과 현재의 우리를 관객이 겹쳐 보게 하는 것이라고 영화를 만든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은 말했다. “손쉽게 희생자들과 동일시하기보다 우리에게 내재된 가해자와의 유사성을 보는 시도가 필요한 때라고 느낀다.”(씨네21 인터뷰)

그 유사성이란 ‘저쪽’에 대한 무감각이다. ‘저쪽’은 여전히 있다.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느린 사람, 이질적인 사람들이 밀려난 구역. 영화가 말하듯 무감각은 무죄가 아니다. 담장이 상징하는 차별하고 착취하는 시스템을 존속시키는 것이 그 무감각이다. 때리고 죽이는 것만큼이나 타인의 고통을 감각하지 않는 것도 가해다.

2024년의 ‘저쪽’을 대표하는 사람, 장애인 권리투쟁을 이끄는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대표다. 최근 나온 책 ‘출근길 지하철’에서 그는 글레이저 감독과 같은 말을 했다. “그냥 살아가는 것 자체로 장애인들에 대한 이 사회의 테러에 동조하는 것이다. (…) 소수자들의 투쟁은 이 세상에서 제대로 감각되지 않던 존재들을 이 세상이 감각할 수 있게 드러내는 과정이다.”

담장은 불변이 아니다. 개인의 운에 따라, 사회의 변덕에 따라 위치와 높이를 바꾼다. 누구라도 ‘저쪽’으로 치워져 ‘감각되지 않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그걸 알고 있었던 박경석은 우리 모두를 위해 미리 싸워 주는 사람이다. 무감각의 폭력을 해체하고자 지하철 바닥을 기며 제 몸을 더럽히는 박경석과 새하얀 바지를 입고 무감각의 편의를 누리는 루돌프. 당신은 누구를 응원할 것인가.




최문선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