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분 넘지 말라”…쇼트폼 OTT와 싸우는 한국영화 “짧아야 산다”

입력
2024.07.09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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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주' '탈출' 등 최근 영화들 100분 언저리
"관객 지루해 할라 1분이라도 줄이려 노력"
투자 감소로 대작 줄며 짧은 영화가 대세 될 듯

“저희들은 1시간 78분짜리 영화라고 해요.” 박찬욱 감독이 2022년 5월 칸국제영화제에서 영화 ‘헤어질 결심’으로 한국 기자들을 만났을 때 한 말이다. “(상영시간이) 2시간 18분이라고 하면 관객들이 지루한 영화라는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2년 전 박 감독의 우려는 요즘 한국 영화계의 공통 관심사가 됐다. 2시간을 넘기기는커녕 100분 이내로 영화 상영시간을 맞추려는 경향이 최근 강해지고 있다. 각종 쇼트폼이 유행하는 시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도 사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다.

1분이라도 줄일 수 있으면 줄여라

올해 개봉한 주요 한국 영화들만 봐도 상영시간 감소가 눈에 확 띈다. ‘시민덕희’가 2시간 이내 상영시간(114분)으로 지난 1월 24일 극장가에 선보이더니 ‘댓글부대’(3월 27일 개봉)는 109분으로 관객과 만났다. ‘그녀가 죽었다’(5월 15일 개봉)는 상영시간(103분)이 더 날렵하다.

올여름 흥행 대전에 나선 영화 대다수의 상영시간은 100분 언저리다. ‘하이재킹’(지난달 21일 개봉)의 상영시간은 100분, ‘핸섬가이즈’(지난달 26일 개봉)는 101분, ‘탈주’(7일 개봉)는 94분,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12일 개봉)는 96분이다. ‘탈출’은 지난해 칸영화제 비경쟁 부문에서 첫 상영될 때 101분이었으나 5분을 더 줄였다. ‘누가 누가 더 짧으나’ 경쟁하는 듯하다. ‘파일럿’(31일 개봉·111분)과 ‘빅토리’(119분), ‘행복의 나라’(8월 14일·124분)가 대서사극으로 느껴질 정도로 상영시간들이 짧아졌다.

지난해 여름 영화들과 비교만 해도 극적으로 줄어든 상영시간을 체감할 수 있다. ‘밀수’(124분)와 ‘더 문’(129분), ‘비공식작전’(132분), ‘콘크리트 유토피아’(130분) 모두 2시간 넘게 스크린에 투영됐다.

상영시간 감소 경향은 영화 개봉 전 실시하는 블라인드 시사회(영화 정보를 사전에 알려주지 않고 일반 관객에게 보여준 후 반응을 점검하는 행사)에서도 감지된다. ‘핸섬가이즈’ 투자배급사 NEW의 김민지 커뮤니케이션팀장은 “요즘 관객은 조금이라도 늘어진다 느껴지는 부분을 참지 못하는데, 블라인드 시사회 때 이 점을 집중적으로 물어본다”며 “상영시간 1분이라도 줄이려는 고민을 최근 들어 더 자주 보게 된다”고 말했다.

'길게, 많이' 보여주려던 시대는 끝났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영화 상영시간은 대부분 100분 이내였다. 2000년대 말 영화 제작이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뀌면서 2시간 넘는 영화들이 주류가 됐다. 디지털 제작으로 필름에 비해 비용이 크게 줄고, 카메라 여러 대를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찍은 분량이 많아진 영향이 컸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등장 역시 상영시간 증가를 부채질했다.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지면서 상영시간이 덩달아 길어졌던 것이다.

최근 상영시간 감소는 고육지책이다. 유튜브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각종 플랫폼에서 쇼트폼이 유행하면서 관객들의 콘텐츠 소비 습관이 급격히 바뀌고 있어서다. OTT 콘텐츠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 역시 상영시간에 압박감을 높인다. ‘그녀는 죽었다’ 투자배급사 콘텐츠지오의 이원재 영화사업본부장은 “최근 관객 성향을 고려해 조금이라도 상영시간을 줄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100분 영화’는 대세가 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극장가 불황으로 대작 기획이 줄어들고 있는 반면 코미디와 공포, 스릴러 등 상대적으로 내용과 전개가 간결한 중·저예산 장르 영화 제작이 늘어날 전망이라서다. 영화가 100분가량이면 하루 상영 횟수가 1회 정도 추가될 수 있다는 상업적 장점이 있기도 하다. 영화 ‘해운대’(2009)와 ‘국제시장’(2015) 등의 제작사 JK필름의 길영민 대표는 “요즘 회의할 때 무조건 100분 이내를 강조한다”며 “대작으로 많이 보여주려던 시대가 끝나가는 점도 상영시간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내다봤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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