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현대사에서 극우 집권을 꾸준히 저지해 온 '공화국 전선'이 재가동됐다. 7일(현지 시간) 조기 총선 결선 투표에서 좌파 연합(신민중전선·NFP)과 범여권(앙상블)이 '반(反)극우 정서'를 매개로 후보 단일화에 나서며 총선 국면 내내 1위를 달리던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을 3위로 밀어낸 것이다. NFP는 '깜짝 1당'에 올랐다.
다만 극우 집권은 저지됐어도 프랑스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서로 다른 이념을 지닌 세 진영이 과반 없이 의석을 나눠 갖는 바람에 당장 총리를 비롯한 정부 구성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의회 해산 및 조기 총선을 결정하며 자초한 정치적 대혼란 수습과 함께 '레임덕(권력 누수 현상)' 최소화를 위해 골몰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8일(현지 시간) 프랑스 내무부에 따르면 전날 실시된 총선 결선 투표에서 NFP는 하원 577석 중 182석을 확보하며 1당에 올랐다. 마크롱 대통령의 정당 르네상스가 주축이 된 앙상블은 168석을, RN을 중심으로 한 극우 블록은 143석을 얻었다.
1차 투표 결과 과반 의석(289석)을 기대했던 RN으로서는 엄청난 패배다. 'RN이 1당에 오를 것'이라는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것은 지난달 30일 1차 투표에서 RN 위력을 확인한 NFP와 앙상블이 후보 단일화에 나선 결과로 풀이된다. 3위 후보가 사퇴하면서 지지표가 RN을 제외한 다른 후보에 흡수됐기 때문이다.
프랑스 르피가로는 '극우 집권 저지'를 목표로 정치 세력이 이념을 초월해 연대하는 이른바 '공화국 전선'이 부활했다면서 "'1차 투표에서는 강하지만 2차 투표에서는 약하다'는 RN의 약점이 이번 기습 패배에서 또 드러났다"고 짚었다. 1950년대 태동한 공화국 전선은 극우가 집권을 노릴 때마다 힘을 발휘해왔다. 조르당 바르델라 RN 대표는 총선 패배 후 "불명예 동맹"이라고 비판했다.
물론 RN 영향력은 프랑스 역사상 최대로 확대됐다. 이번 총선 결과 의석은 2022년(89석)보다 54석이나 늘었다. 2017년엔 8석에 불과했다. RN의 실질적 지도자 마린 르펜 의원은 "우리의 승리는 늦춰졌을 뿐"이라고 자신했다.
1당을 차지한 NFP는 즉각 '정부 구성 권한'을 요구했다. 프랑스 헌법상 대통령이 총리 임명권을 갖고 있지만 하원이 불신임할 수 있는 탓에 통상 의회 다수당의 지지를 받는 사람을 총리로 임명해 왔다. NFP에 속한 강경 좌파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의 장뤼크 멜랑숑 대표는 "좌파 연합은 집권할 준비가 돼 있고, 대통령은 NFP에 국가 운영을 요청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 구성은 안갯속이다. 세 진영 모두 서로와의 협력에 반감을 갖고 있는 터라, 누가 누구와 세를 규합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LFI와 사회·공산·녹색당이 연대한 NFP 내부에서도 권력 배분 관련 논의가 필요하다. 정부 구성 시한은 별도로 정해진 바 없기 때문에 이러한 교착 상태가 장기간 이어질 수 있다.
의회 역시 불안정해졌다. 향후 입법 과정에서 세 진영 간 힘겨루기가 반복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극우 집권·범여권 소수당 전락'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이미 치명상을 입은 상태다.
지난달 초 유럽의회 선거에서 RN이 1위를 차지하자 정치적 주도권을 되찾고자 조기 총선이라는 승부수를 띄웠지만, 결과적으로는 좌파 연합에 1당을 내주고 RN 의석만 크게 늘렸기 때문이다. 국가를 총체적 혼란에 빠뜨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후 야당과 '동거 정부'를 구성하면 국정 운영 방향 또한 대폭 수정이 불가피하다. 권력의 중심축이 의회로 이동하는 데 따른 레임덕이 불가피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마크롱 대통령 임기는 2027년 5월까지다.
이날 투표율은 66.6%를 기록했다. 2022년 총선 결선 투표 때보다 20.4%포인트 높다. 1차 투표(66.7%)에 이어 높은 투표율을 보인 것은 갑작스럽게 치러진 선거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데다, 마크롱 정부에 대한 불만 및 극우 집권에 대한 우려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