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정신을 똑바로 차렸어야 했다. 오늘만큼은 누가 불러도 대답하지 말라는 엄마 말에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그러고도 핏줄이 뭔지 방심했다. 작은오빠가 부르자마자 “응” 하고 바로 대답해버렸다. 그러곤 오빠의 더위를 샀다. 정월대보름날 아침의 일이다. 엄마는 “오래비(오빠) 더위를 산겨? 한 살이라도 젊은 니(너)가 샀으니 그나마 다행이여” 하며 소리 내 웃었다.
며칠 전 오빠가 너스레를 떨었다. “더위를 미리 팔아서인가, 올여름엔 당최 덥지가 않네.” 아뿔싸! 지난겨울 미리 사 뒀던 오빠의 더위가 떠올랐다. 순간 더위의 덩치가 커지더니 기운이 슬슬 빠졌다. 입맛도 떨어졌다. 나, 제대로 더위 먹었나 보다.
더위는 음식이 아닌데 어떻게 먹지? 궁금한 이가 많겠다. 답은 우리말 ‘먹다’의 풍부한 뜻에서 찾을 수 있다. ‘먹다’는 몸뿐만 아니라 정신으로도 어떤 것이 들어온다는 뜻의 동사다. 입으로 밥을 먹고 술을 먹고 약을 먹어 배 속으로 들여보내는 건 누구나 알 게다. 정신으로 들어오는 것 역시 다양하다. 겁을 먹고, 앙심을 먹고, 마음을 독하게 먹기도 한다. 뜻밖에 놀랐을 때 내뱉는 "식겁했어"는 '겁먹다'를 한자어로 표현한 말이다.
‘먹다’는 남의 재물을 부당하게 취할 때도 어울린다. 뇌물을 먹는 놈이 있는가 하면, 남의 꿈을 부풀린 후 돈만 먹고 튀는 사기꾼도 있다. 경리 직원이 회삿돈을 먹어 죗값을 치르는 일 역시 종종 일어난다. 이런 자들은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싸다.
‘먹다’에는 무엇을 하거나 어떻게 된다는 뜻도 있다. 누군가의 바지가 엉덩이 사이로 들어가면 "바지를 먹었다"고 놀린다. 나이와 상관없이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끼리는 친구를 먹는다. 어디 그뿐인가. 나이도 먹는다. "네 살 먹은 아이", "내년이면 마흔을 먹는구나"처럼 일정한 나이에 이르거나 나이를 더할 때도 '먹다'가 어울린다.
이쯤 되면 '더위 먹었다'가 무슨 뜻인지 감 잡았을 듯하다. 날씨가 몹시 더워 몸 상태가 나빠졌다는 뜻이다. 귀나 코가 막혀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도 '먹다'를 쓸 수 있다. 감기에 걸려 열이 날 경우 귀가 먹고, 코 먹은 소리를 내기도 한다.
‘먹다’ 하면 권투 선수 홍수환씨를 빼놓을 수가 없다. 50여 년 전 그의 외침에 대한민국이 흥분했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어떤 등급을 차지하거나 점수를 땄을 때의 '먹다'이다. 1970·80년대 초등학교를 다녔던 세대라면 대문을 열고 팔짝팔짝 뛰면서 이런 말 한 번씩은 했을 게다. “엄마, 나 일등 먹었어!” "엄마, 나 100점 먹었어!" "엄마, 나 반장 먹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