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대일 졸속 어업협상, '쌍끌이' 특종(1999)

입력
2024.08.12 04:30
21면

편집자주

매일매일, 시시각각 한국일보 플랫폼은 경쟁매체보다 빠르고 깊은 뉴스와 정보를 생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1954년 창간 이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거나 국민적 감동을 이끌어낸 수많은 특종이 발굴됐다. 지난 70년 다수의 특종과 사건 중 파장이 컸던 내용들을 연도별로 안배해 ‘70대 특종’을 골라내 뉴스 이용자들에게 소개한다.

'쌍끌이'라는 단어는 두 주체가 함께 상황을 주도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언급할 때 사용된다. 그런데 이 말이 언중(言衆)에 의해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한 건 1999년부터다. 당시 한일 어업협상에서 터진 '쌍끌이' 사태가 언론을 통해 크게 알려지면서, 수산업계에서 사용되던 용어가 확장된 의미로 쓰였다.

쌍끌이는 어선의 조업방식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어선 두 척이 자루처럼 생긴 저인망(底引網)을 바다 밑바닥으로 끌고 다니며 조업하는 방식인데, 한일 어업협상에서 우리 측이 '쌍끌이' 선단 몫을 챙기지 못하면서 사태가 확산됐다. 한국일보는 당시 협상 주무부처인 해양수산부의 졸속 협상을 중앙 일간지 가운데 가장 먼저 대대적으로 보도, 김대중 정부의 안일한 대일협상 실체를 밝혀냈다. 또 이후 후속 협상에서도 우리 정부가 보인 주먹구구 행태를 함께 고발해 장관 경질 및 피해 어민 보호 등 후속 대책을 이끌어 냈다.

장인철 기자가 작성한 1999년 2월 27일 자 한국일보 1면 관련 기사에 따르면 한일 간 자국 수역 내 상대국 어선의 조업을 보장하기 위한 실무협상에서 당시 우리 해양수산부는 우리 어선들의 업종과 어기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바람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2월 13일 종결된 실무협상에서 ‘일본 배타적경제수역(EEZ) 내 한국 어선의 조업조건 및 입어절차’에 ‘쌍끌이’ 선단 250여 척의 몫이 빠지면서 5,000억 원 가까운 어민 피해가 발생했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일보 지적에도 불구, 당초 정부는 피해 규모를 축소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여론의 압박으로 일본에 재협상을 요청했지만 재협상에서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한국일보는 쌍끌이 사태 이후에도 우리 측이 보인 일련의 안일한 대응을 계속 고발했다. 김선길 해양수산부 장관이 실무 협상이 진행 중인 과정에서 남극행을 감행하는 등 어민 정서와 동떨어진 행보로 일관한 것도 폭로했다. 일본 농수산 장관과의 담판을 위해 3월 11일 일본행을 강행했지만, 12일 오후까지도 회담일정을 확정하지 못하는 황당한 상황도 함께 전했다.

한국일보의 '쌍끌이 특종'은 우리 정부가 이후 벌어진 대외 통상협상에서 경각심을 갖고 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벌어진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과 쌀 관세화 유예 협상 등에서 과거보다 진전된 모습을 보인 건 '쌍끌이 사태'가 반면교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연재 일정상 70개 특종 가운데 50개를 선별 게재하기 때문에, 일부(예: <34>흑금성은 박채서·1998) 특종은 소개되지 않습니다. 독자님들의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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