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목소리, 긴 호흡의 강대국 외교, 아세안에 배워라"

입력
2024.07.03 18:30
24면
임성남 전 주아세안대표부 대사 인터뷰

편집자주

<정진황의 앵글>은 외교 안보 현안에 대한 주요 인물 인터뷰와 소재를 다룹니다. 안보 현안만큼 다양한 논점이 제기되는 분야도 없습니다. 여러 각도에서 보고자 합니다.

한반도 주변 강대국 4강 외교를 제외하고 외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상대는 동남아국가연합, 즉 아세안(ASEAN)이다. 글로벌 중추 국가를 지향하는 우리의 중요한 교두보가 아닐 수 없다. 한류 인기의 중심지이자 중요한 투자처다. 해상 수송로 요충지에 위치한 아세안은 미국과 중국의 외교적 군사적 격전지이기도 하다. 올해는 한국과 아세안이 대화 관계를 맺은 지 35년. 임성남 전 주아세안대표부 대사를 만나 대아세안 관계, 미중 갈등, 해양안보 등 현안에 대한 견해를 들어봤다. 임 전 대사는 “중요한 파트너로서 대아세안 정책의 연속성이 중요하다”며 “미중 갈등에 대응하는 아세안 자세를 보면 긴 호흡의 외교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대아세안의 정책연속성 있지만 아쉬움도
이름 바꾼 건 잘 팔리는 상품 버린 격
총괄 조직 없어지면 동력 떨어지기 마련

-문재인 정부의 신남방정책과 윤석열 정부의 한국·아세안 연대 구상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윤 정부는 인도태평양 전략의 세부 이행을 위한 한· 아세안 연대 구상이라 했습니다. 일종의 하위 개념이죠. 문 정부의 신남방 정책은 기본적으로 아세안을 대상으로 한 정책이니 태동 배경이 다르다고 볼 수 있죠. 신남방 정책이 경제협력에 비중이 있는 반면 한· 아세안 연대 구상은 안보협력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봐야 합니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정책 뒤집기가 일어나는 상황인데 대아세안 정책은 어떻습니까.

“같은 정책의 연장선에 있다고 봅니다. 아세안 협력기금이 늘어나는 경향만 보더라도 이어달리기를 하는 셈이죠. 문 정부 때 700만 달러에서 1,400만 달러로 늘어났고, 윤 정부 들어서는 1,600만 달러, 임기 말에는 3,200만 달러로 늘리기로 돼 있습니다. 다만 이름을 바꾼 건 아쉽죠. 신남방 정책은 NSP(New Southern Policy)라는 약칭으로 아세안에 엄청 팔았습니다. 아세안 외교관이나 지식인은 NSP라면 다 알아듣습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확립된 상황에서 이름을 버린 모양새죠. 신남방정책 2.0이 어땠을까 싶습니다. 문 대통령도 임기 중에 아세안 10개국을 순방하고, 대통령 직속 신남방 특위를 둘 정도로 공을 들였죠. 지금 정부에서는 그 조직이 없어져 아무래도 동력이 떨어지겠죠.”

-대아세안정책이 조금은 소홀해졌다는 의미인가요.

“한국이 주관하는 한· 아세안 특별정상회의는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제주,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부산, 문재인 정부 때인 2019년 부산에서 5년마다 열렸습니다. 대화 관계 35년이 되는 올해는 무산됐어요. 아세안 측에서 10년 단위로 하는 가이드라인을 내세워 미뤄진 걸로 이해하는데 우리가 더 밀어붙였다면 어땠을까 합니다. 아세안에 대한 우리 정부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을 겁니다.”


-아세안은 우리에게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중국 해안선 1만5,000km 제일 하단의 남중국해-대만-동중국해와 센카쿠 열도-우리 서해로 이어집니다. 우리 입장에서 가장 먼바다가 남중국해인데 이를 둘러싼 지역이 아세안입니다. 아세안 인구 6억7,000만 명 가운데 중위 연령이 30세입니다. 생산가능 인구나 소비 인구가 많고, 성장잠재력도 엄청납니다. 미중 경쟁 격화로 중국에서 빠져 나온 기업, 공장들이 아세안으로 몰려 오고 있습니다. 아세안 가치가 상종가를 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세안 전체 교역 규모를 따지면 우리의 두 번째 교역 대상입니다. 한국사회가 당면한 인구 절벽 대응에도 아세안은 중요하고 절실한 파트너로 볼 수 있습니다.”


윤 정부 아세안정책 역내 안보협력 포함
물동량, 원유수송 등 우리 국익에 밀접
직접 간여는 원양 작전 역량 아직 없어

-이웃 일본의 대아세안 정책은 어떻습니까.

“경제성장과 함께 일본이 동남아 진출을 노린 1974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가 전후 30년 만에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아세안을 방문했을 때 반일 시위가 엄청났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점령에 대한 아픈 기억 때문이죠. 77년 후쿠다 다케오 총리가 ‘후쿠다 독트린’이라는 동남아 외교정책을 발표합니다. 군사대국이 되지 않겠다, 마음을 열고 교류를 하겠다, 대등한 협력 파트너가 되겠다는 3가지 원칙이죠. 이 슬로건으로 일본은 동남아에 많은 공을 들입니다. 도로나 항구를 새로 건설할 경우 무상으로 어디가 좋을지 조사한 뒤 상대국과 협의해 유상원조를 하고 그다음 기업이 들어갔습니다. 이런 삼박자로 일본과 아세안 관계가 단단한 기초 위에 놓였습니다. 후쿠다 독트린을 지금도 얘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린 분절화가 좀 심했죠.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아세안 연대구상은 아세안 역내 안보에 대한 간여를 염두에 둔 걸까요. 해양안보 중요성이 커진 만큼 정책적 준비의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요.

“한· 아세안 연대 구상에는 자유, 평화, 번영으로 자유라는 개념이 새로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내용적으로 경제, 사회, 환경적 프로젝트에 방점이 계속 찍혀 있습니다. 윤 정부 들어 아세안 확대 국방장관회의 같은 데 참석하고 있습니다. 중동에 파견하는 우리 해군 역할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경계, 호송이죠. 유일하게 전투상황까지 벌어진 군사작전이 삼호 주얼리호 피랍 사건입니다. 청해 부대가 해적을 제압한 아덴만 여명 작전이죠. 만약 남중국해 분쟁 시 우리 해군력을 투입하는 건 현재로선 원양 작전 역량이 안 되는 일로 보입니다만 미래는 모를 일이죠."


중 해양 굴기와 미 인태전략 충돌 지점
남중국해 전면 충돌 가능성은 없어 보여
아세안 강경대응 못하지만 실리 전략

-중국과의 남중국해 분쟁 상황에 대해 아세안이 심각하게 보고 있습니까.

“중국의 남중국해 군사기지화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봐야죠. 중국의 해양굴기와 미국의 인태 전략이 충돌하는 지점입니다. 하지만 아세안의 중요 원칙 중 하나가 컨센서스입니다. 남중국해나 미중 경쟁에 대해 아세안이 취하는 입장은 공통분모의 집대성이라 보기엔 뻔해 보입니다. 지난해 12월 아세안 외무장관 회담에서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개별 성명을 채택했는데 제목에는 남중국해가 들어 있지 않아요. 평화와 안정을 유지해야 된다거나 항행의 자유가 확보돼야 한다는 일반적 내용입니다. 개별 국가 차원에선 스펙트럼이 넓은 탓이죠. 가장 적극적인 나라는 필리핀이고, 중국 입장을 지지하는 쪽은 캄보디아나 라오스인데, 베트남은 남중국해 주요 당사국이지만 한발 떨어져 상황을 관망하는 걸로 보입니다. 미국과 중국을 다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입장이죠."

-남중국해에서 미중 충돌이 격화할까요.

"미국과 중국 군함이 근접하는 신경전이 있지만 작심하고 싸울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봅니다. 전면 충돌을 통해 얻을 이익보다는 상대방을 억제하는 게 비용이 적게 들죠. 중국이 많이 쓰는 표현 중에 ‘총 닦다가 오발사고 난다’는 말이 있는데 우발적 충돌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국 굴기에 미국은 한미일군사협력이나 오커스 등 격자형(Lattice Work) 접근, 동맹 전략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남중국해에서도 미국은 일본, 필리핀을 묶어 중국의 해양 굴기에 맞서고 있는 양상입니다. 물동량의 30%, 원유수입의 90%가 여기를 지나는 우리 입장에서도 예의주시할 상황이죠."

아세안 원칙 반복 지속하며 영향력 제고
하나의 목소리, 긴 호흡으로 끌고가
우린 하나의 목소리 내지 못해 비용 커

-아세안의 대응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이 뭡니까.

"아세안은 남중국해 분쟁에 강경대응을 하지 못하지만 그걸 가지고도 자기 영향력을 확대하는 전략을 쓰고 있습니다. 2019년 아세안은 '인도태평양에 관한 아세안의 관점(AOIP)'이라는 문서를 채택합니다. 아세안 판 인도태평양 전략이죠. 인태지역은 경쟁이 아니라 대화와 협력의 지역이 돼야 한다거나 모두를 위한 발전과 번영의 지역이 돼야 한다는 등 원론적 내용입니다. 또 아세안 중심성, 개방성, 투명성, 포용성을 원칙으로 하죠. 이걸 바이블처럼 반복하고 조금씩 확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한미일 빼놓고는 사실상 우리가 속한 그룹이 없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멕시코, 인도네시아, 한국, 터키, 호주를 묶은 믹타(MIKTA)는 활력을 많이 잃었습니다. 5대양 6대주의 대표적 중견 국가 모임인데 창의력을 발휘해서 활성화시키고, 우리가 속한 틀을 계속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AOIP에서 얘기했듯이 공통분모를 만들고 이를 지속적으로 끌고 나가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지난해 AOIP에 대한 아세안과 한국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는데 왜 했겠어요. 아세안이 해 달라고 하니까 한 것이죠. 하나의 목소리를 긴 호흡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거기서 영향력이 생기는 겁니다. 우리 내부적으로 초당적 대외정책 범위를 넓혀 나가야 합니다. 개별 국가로 보면 싱가포르가 돋보입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떻게 하느냐고 질문하면 고위 외교관들은 우리는 친미도, 친중도 아니라고 해요. 자기의 이익과 시각에 따라서 항상 판단을 합니다. 우리는 그게 부족합니다. 우린 주변 강대국에 둘러싸인 분단 상황에 내부적으로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사실 엄청 큽니다."

미중 전략 경쟁 20~30년 지속될 듯
차기 지도자도 방향전환 쉽지 않아
불확실성에 우리에겐 도전의 시기

-미중 경쟁을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개인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전직 외교관들이나 학자를 만나 미중 경쟁이 끝난 다음 미국은 어떤 세상을 원하냐고 물으면 거의 답이 없어요. 시진핑 주석이 해야 할 바를 한다는 분발유위(奮發有爲) 목표를 이룬 다음 중국이 국제사회에 어떤 공공재를 제공할 수 있느냐고 물으면 역시 답이 없습니다. 경쟁에 함몰돼 긴 시야에서 앞날을 보지 못하고 있거든요. 아시아태평양 시대의 중국 포용에서 인도태평양 시대의 중국 봉쇄, 견제로 넘어오게 된 것이죠. 금융위기 같은 미국의 위기와 중국의 부상이 계기가 됐습니다. 또 미중 간의 수출입, 교류로 보면 혈관과 신경을 다 잘라서는 서로 죽게 되니 디리스킹으로 변화한 것 아니겠어요. 미국 사람들이 쓰는 표현으로 ‘스몰 야드 하이 펜스’라고 작은 뜰에 울타리를 높게 치겠다는 뜻이죠. 그러면서도 미중 고위급 간 교류, 대화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중국 역시 내부적으로 미국에 너무 빨리 도전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지금의 불확실성과 리스크 시기는 20~30년간 계속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차기 지도자가 들어서더라도 방향 선회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지금의 경쟁은 서막에 불과해 보이고 경쟁의 승자를 알 수 없는 불투명한 시기는 우리에겐 엄청난 도전이 되겠죠."

-북한과 러시아의 동맹조약 이후 중국의 입장을 어떻게 봐야겠습니까.

“중국은 북러 밀착에 올라 탈 생각은 없다고 봅니다. 북러 정상회담에 대해 북러의 일일 뿐 중국 일은 아니라는 게 기본 입장으로 보입니다. G2 반열에서 미국과의 경쟁에 온 힘을 쏟는 중국 입장에서 러시아는 주니어 파트너로 보고 있고 북한은 말할 나위도 없지요. 우리로선 중국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해 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북중러 결집을 최악의 시나리오로 본다면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그렇죠."

한미일에 올인하는 '홑주머니' 외교
상황의 가변성 고려하면 위험요소
외교안보의 정치화는 함정에 빠져

-가치 외교와 균형 외교라는 두 트렌드가 있어 보입니다. 윤 정부의 가치외교에 대해 야당은 안보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판하는 입장인데요.

“모든 외교정책 방향이 한미동맹, 한미일 안보협력에 맞춰진 ‘홑주머니’ 외교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상황의 가변성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미국 대선도 그렇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일본 총리가 더 보수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올 수도 있습니다. 외교 안보 정책을 포함해서 정책이 지나치게 정치화해 있는 건 문제이고, 지양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과거 정부가 한 정책을 다 잘못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죠. 긴 호흡의 외교를 해야 해요. 어느 정부든 외교정책엔 가치와 실리 측면이 다 담겨 있습니다. 다만 어떤 비중으로 얼마나 혼합하느냐는 선택의 문제로 봅니다. 모든 정책 이슈를 다 정치화하고 정치적 레테르를 갖다 붙일 경우 결국은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정진황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