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을 향한 한국 관객들의 관심이 뜨겁다.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미야자키 하야오·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팬이 국내에 수없이 많은 상황이다. 드라마, 영화 등 콘텐츠의 힘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만화의 인기도 높은 한국에서 '애니메이션 거장'은 탄생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디즈니·픽사는 한국에서 수많은 팬들을 양성했다. '인사이드 아웃 2'는 개봉 18일 차에 5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엘리멘탈'은 2023 연도별 박스오피스 순위에서 '서울의 봄' '범죄도시3'에 이어 3위 자리를 차지했다. '거장'으로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신카이 마코토 감독 또한 한국에서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지난해 언론시사회조차 진행하지 않았으나 201만 관객을 동원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선보인 '스즈메의 문단속'은 2023 연도별 박스오피스 순위 4위에 올랐다.
애니메이션을 향한 한국 관객들의 관심이 뜨겁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거장'의 탄생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다. 스토리 구성 능력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 창작자들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증명됐다.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은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오스카 4관왕 신화를 썼다. 박찬욱 감독은 칸이 사랑하는 감독이라는 의미를 가진 '칸느 박'이라는 별명의 소유자다.
만화를 향한 관심도 뜨겁고, 많은 창작자들이 뛰어난 역량을 지닌 상황인데도 '한국의 애니메이션 거장'이 탄생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환경 문제가 크다.
한창완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텍 전공 교수는 본지에 "한국에서는 성인들이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없다"고 말했다. 애니메이션을 보려면 투니버스 애니맥스 등 전문 채널을 찾아 감상해야 하고, 그마저도 프라임 타임에는 어른이 볼만한 만화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일본의 경우 극장에서 애니메이션이 많이 상영되기 때문에 시장이 크다. 우리나라 시장보다 관객 시장층이 3배 넓다. 애니메이션을 실사보다 더 봐 주니까 지속적으로 기술 혁신이 이뤄지고 전문 애니메이터들이 축적된다. 그렇게 스타가 나올 수 있는 거다"라고 말했다.
그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만들려면 비용이 아무리 적게 들어도 30억 원이다. 사람 몇백 명이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런데 (영화가 흥행에 실패해) 10억 원도 못 건지다 보니 투자하는 사람들이 줄었고, 새로운 프로젝트도 없어졌다. 그래서 젊은 애니메이터들이 이 시장에 잘 안 들어오려고 하는 상황이다"라고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그러면서 "현재 한국에 애니메이션 회사의 수는 많지만 대부분 프리 프로덕션만 한다"고 덧붙였다.
물론 한국의 애니메이션 발전을 아예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한 교수는 메인 프로덕션 제작 인력 육성, 이 인력들이 평생 업계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울 안정적인 시스템 구축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OTT의 발전 또한 한국 애니메이션의 성장에 대한 기대를 높인다. 한 교수는 "OTT 이용자는 은연중에 자기 포트폴리오를 만든다. 영화를 본 후 다큐멘터리도 봤다가 드라마, 애니메이션도 봤다가 한다. 2030세대의 애니메이션 시청률이 늘어나는 중이다"라고 분석했다.
아울러 그는 "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 광고 애니메이션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젊은 감독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굳이 장편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장편은 할리우드와 일본의 자본을 따라가려면 힘들 거다. 젊은 감독들이 쇼츠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많이 만들어 거기에서 인지된 캐릭터로 중장편을 가는 것도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대중이 작품의 현실성에 지나치게 주목하는 경향 또한 달라진다면 더욱 유의미한 변화가 생길 것으로 예상된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우리나라 관객들이 판타지와 리얼리즘의 중간에 해당되는 콘텐츠를 이상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면서 "현재로서는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스즈메의 문단속' 같은 작품을 한국에서는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 리얼함만을 너무 추구하는 것은 우리나라 콘텐츠 발전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