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재임 당시 행위를 책임지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주장을 미 연방대법원이 받아들였다. 2020년 대선 결과 뒤집기 시도 혐의로 기소된 사건과 관련, ‘면책특권’을 내세운 트럼프 전 대통령의 항의를 일부 수용한 것이다. 당장 오는 11월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나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사법 리스크’를 대폭 줄여 줬다는 분석과 더불어, 백악관 복귀를 채비하는 그에게 ‘무소불위 왕관’까지 씌워 준 꼴이라는 비판이 쏟아진다.
미 연방대법원은 1일(현지 시간) 전직 대통령의 재임 중 공적(Official) 행위가 법적 면책 대상이라고 결정했다. 지난해 8월 초 잭 스미스 특별검사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결과 전복 시도 △1·6 의사당 난입 선동 등을 연방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사건과 관련한 판단이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헌법상 핵심 권한을 행사한 경우 면책특권은 절대적”이라며 “다른 모든 공적 행동도 기소 면제 대상으로 추정될 수 있다”고 밝혔다. 비공식적(Unofficial) 행위에만 면책특권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대법원은 못 박았다.
결정적 명분은 퇴임한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보복의 차단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미래의 기소에 대한 광범위한 면책이 없다면 대통령이 국가 이익 증진에 필요한 대담한 행동을 주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의 피터 슈피겔 미국 담당 편집장은 이날 칼럼에서 “정책 차이를 범죄화하려는 미국 정치 지도자들의 시도가 1990년대 이후 증가세인 만큼 일리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 논리에는 보수 성향 대법관 6명만 동의했다. 진보파 3명은 생각이 달랐다. 소수 의견을 낸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전직 대통령에게 (절대적인) 형사 면책권을 부여한다는 결정은 ‘누구도 법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리 헌법과 정부 시스템의 기초 원칙을 조롱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네이비실(미 해군 특수부대)’에 정적 암살을 명령해도, 권력을 지키려고 쿠데타를 조직해도, 사면 대가로 뇌물을 받아도 모두 면책”이라며 “대통령은 법 위에 군림하는 왕이 될 수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승자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라는 게 중론이다. 대법원은 그의 대선 결과 전복 시도 혐의에 대한 면책 여부 판단을 하급심 법원에 넘겼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의 공식·비공식 결정에도 시간이 걸린다. 대선 전 재판이 열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내다봤다. 2일 하계 휴정기에 들어가는 대법원의 재판 재개는 10월 첫째 주에나 이뤄져, 하급심 판단이 빨리 나와도 트럼프 전 대통령이 항고하면 속수무책이다. 대선 승리 시에는 법무장관에게 요구해 공소를 취하할 수도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명백한 트럼프의 정치적 승리”라고 규정했다.
대법원은 기소도 어렵게 만들어 놨다. 예컨대 검찰이 대통령의 비공식 행위를 범죄로 주장하려 할 때 공식 행위는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 “극복하기 힘든 장애물”(월스트리트저널)이다. 면책 대상 판별을 하급심에 맡긴다고 하고서는 2020년 대선 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법무부 당국자들과 했던 논의에는 면책을 적용하라는 식으로 지침을 제시한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결정 직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 “우리 헌법과 민주주의의 큰 승리”라고 썼다.
이번 대법원 결정은 재집권에 도전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에겐 더할 나위 없는 ‘호재’다. 하지만 그 여파는 대선 이후에도 미칠 공산이 크다. FT 칼럼은 “문제는 트럼프가 여느 대통령과 다르다는 점”이라며 “우리는 정적들에게 복수하려고 정부 권력을 사용할 것이라고 맹세하고, 적어도 하루는 독재자가 되겠다고 다짐한 인물이 반년 뒤 집권할 수도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짚었다.
민주당 대선 후보인 조 바이든 대통령이 부각하는 것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위험성이다. 그는 이날 백악관 긴급 대국민 연설에서 “미국에는 왕이 없다. 오늘 대법원 결정은 법치를 훼손했다”며 “이제는 법원이 했어야 할 일을 국민이 해야 하고, 트럼프의 행위를 심판해야 한다”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