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은 시 안 읽는 사람부터 잡아먹는다"...밈은 문학을 구원할 수 있을까

입력
2024.07.02 15:29
22면
서울국제도서전서 밈 활용한 홍보 '눈길'
밈된 틱톡 영상 덕에 흥행 역주행 소설도 
“위기 있다면 기회 있어”…글의 힘 기대↑

“Q. 안 읽는 책을 사놓는 사람을 부르는 말은?

오답: 지적허영

정답: 출판계의 빛과 소금”(출판사 다산북스)

“외계인 침공 시 시(詩) 안 읽는 사람이 먼저 잡아먹힌다.” (문학동네)

“귀하를 즐讀(즐독·즐겁게 읽기)의 세계로 안전하게 모셔드립니다.” (안전가옥)

지난달 26일부터 30일까지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이하 도서전)을 맞아 각 출판사에서 내놓은 홍보용 스티커에는 이처럼 온라인 밈(meme·온라인 유행 콘텐츠)을 활용한 문구들이 눈에 띄었다. 약 15만 명이 몰리며 흥행한 도서전의 또 다른 주인공을 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갈수록 독서 인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밈에 익숙한 세대에게 책의 매력을 알리려는 필사적인 움직임이다.

촌스러운 스티커에 왜 20대가 열광했나?

도서전에서 문학동네 시인선을 구입하면 나눠 준 스티커엔 ‘시집도 집이다’ ‘문학동네 시인선도 선(善)이다’ 등 온라인 유행어를 모르면 이해하지 못할 문구들이 적혀 있다. 이 스티커는 인스타그램에서 밈을 통해 시를 소개하는 계정 ‘포엠매거진’과의 협업으로 기획됐다. 문학동네 관계자는 “준비한 스티커 물량이 모두 나가 추가 인쇄를 해야 했다”고 전했다. 다산북스와 안전가옥에서도 밈 스티커의 인기가 높았다.

밈 스티커는 요새 유행하는 레트로(복고) 감성을 살려 일부러 촌스럽게 디자인한 것도 특징이다. 문학동네의 밈 스티커를 갖고 싶어 친구와 도서전에 갔다는 김윤아(27)씨는 “귀여운 스티커라 노트북에 붙일 생각”이라면서 “시가 엄숙하고 무거운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즐기는 콘텐츠라는 느낌이라 좋다”고 말했다.

밈의 힘으로 8년 전 소설 흥행 역주행 사례도

밈으로 흥행 ‘역주행’을 해낸 작품도 등장했다. 미국 작가 한야 야나기하라의 장편소설 ‘리틀 라이프’다. 2016년 한국에 출간됐을 땐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올해 3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온라인 서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 소설을 읽고 우는 미국의 북톡(BookTok·독서 후기 등을 찍어 올리는 짧은 영상) 챌린지가 밈이 되면서 한국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주목받았다. 소설 분량이 3권으로 적지 않고 아동 학대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루지만 입소문을 타면서 지난달 책 재고가 바닥나 품절 사태까지 일어났다.

밈을 활용한 홍보에서 출판계는 한발 늦은 편이다. 빠르게 만들어졌다가 쉽게 휘발되는 밈의 특성이 문학과는 거리가 멀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인스타그램 ‘포엠매거진’ 운영자는 이런 거리감이 오히려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봤다. 그는 한국일보에 “여전히 시는 이해하기 어렵고 이해 가능한 소수를 위한 문학이라는 인식이 있는 반면 밈은 가볍고 모두를 위한 것”이라면서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것들을 합치면 시에 대한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그저 웃긴 밈? 책 안 읽는 현실 비판 담아내

출판계 밈에는 공통점이 있다. 책이 외면 받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도서전에 오신 당신은 상위 0.001%입니다”라거나 “경악! 독서가 모자란 한국…1년에 1권만 읽어도 상위 1푼으로 거듭난다” 등의 도서전 홍보 문구가 대표적이다. 종이책 기준 성인 독서율(1년간 책을 1권이라도 읽은 사람의 비율)이 지난해 32.3%로 곤두박질친 상황에 대한 자조다. “인터넷 밈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비판을 유머로 무마하듯이, 그 반대로 유머를 통해 비판적인 인식을 드러내는 것도 가능하다“는 책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을 쓴 김경수 작가의 말 그대로다.

밈은 한국 문학계, 나아가 출판계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 한순간의 유행으로 그칠 것이란 우려만 있는 건 아니다. 포엠매거진 운영자는 이렇게 말했다. “위기가 있다면 기회가 와요. 사람들은 스마트폰 속 쇼츠(Shorts·짧은 영상) 대신 책을 펼쳐 글을 읽을 거고 글이 갖는 힘이 더 커질 거예요.”

전혼잎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