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자본시장연구원에서 발간된 흥미로운 보고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원인 분석'을 보면 아래와 같은 <그림>을 발견할 수 있다. 연구자들은 45개 세계 주요 증시를 대상으로 비교했는데, 주주환원율 면에서 한국이 최하위권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주환원율은 순이익 대비 배당 및 자사주 매입의 비중을 측정한 것이다. 세계 주요 기업들은 순이익의 60~70%를 주주들에게 보상하는 반면, 한국은 20~30% 수준을 유지하는 게 현실이다.
한국의 주주 보상은 왜 이렇게 낮은 수준을 유지할까. 필자는 얼마 전 있었던 태영건설 사주 일가에 대한 정부 및 채권단의 자구책 요구에서 주주 홀대 경영의 기원을 찾을 수 있었다. 당시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태영의 철저한 자구 노력을 유도해 채권단과 원만하게 합의·설득이 이뤄지고 시장 참여자의 신뢰와 협조를 얻을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태영건설은 이미 심각한 자금난에 빠졌는데 추가적인 자구책이 나올 수 있나? 불과 1주일 뒤 한덕수 국무총리는 ”경영자가 자기의 뼈를 깎는 고통스러운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의문을 풀어주었다. 태영에게 요구한 자구책이란, 결국 윤세영 태영그룹 회장 일가가 보유한 사재를 내놓으라는 뜻이었던 셈이다.
소액주주 입장에서 보면 ‘전횡을 휘두르던’ 오너 일가가 경영 실패의 책임을 진다는 면에서 속이 시원한 부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주식회사 제도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알고 있는 이들에게 오너 일가의 사재출연은 뭔가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잠시 시장경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시장경제를 가장 잘 나타내는 상징은 어떤 게 있을까. 여러 종류의 시장이 떠오르지만 증권거래소에서의 주식 가격이 급등락하는 모습만큼 인상적인 풍경을 찾기 힘들다. 주식회사 제도가 생기기 전, 사업을 시작할 때 ‘인생을 거는 수준의 결의’가 필요했다. 일이 안 풀려 망하게 될 경우, 사업으로 진 부채를 끝까지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 전통은 굉장히 오래된 것으로, 고대 사회에서 채무불이행은 매우 가혹하게 다뤄졌다. 로마에서는 아무리 작은 채무라도 이행하지 않으면 채무자의 모든 재산을 몰수해 경매에 부쳤는데, 서구 세계에서 이 관행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따라서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좋은 사업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실행에 옮기는 것은 대단히 힘들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하고 복잡해지면서 ‘무한책임’ 원칙이 경제 성장에 걸림돌이 된다는 인식이 퍼졌다. 특히 대항해시대가 열린 후 1, 2년 단위가 아닌, 수년 혹은 수십 년에 걸친 사업을 진행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면서 ‘유한책임’을 기본으로 오랫동안 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 즉 주식회사에 대한 필요성이 거론됐다. 사업에 실패하더라도 자기가 투자했던 지분만 포기하면 더 이상 책임을 추궁당하지 않는 게 ‘유한책임’ 제도의 핵심이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부터 아메리카 대륙 서쪽 해안까지 펼쳐지는 광대한 지역에서 요새를 쌓고 군사력을 행사하는 등 네덜란드 정부가 할 일을 대신했다. 더욱이 동인도회사 암스테르담 사무소의 초대 주주로 등록한 사람이 1,143명에 이를 정도여서 거대한 자본금을 쉽게 모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이 거대 조직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위험도 없었다. 소유권이 경영권과 분리돼 중요한 의사 결정은 선출된 이사들이 내렸고, 투자자들은 이들의 결정을 받아들이거나 주식을 팔거나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주식회사는 법적으로 독립적인 실체였기에 소유자 개개인과 분리돼 수명에 제한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기업이 어려움을 겪을 때 오너의 사재출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은데, 이는 주식회사 설립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한국 특유의 주식회사 시스템이 만들어진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2년 이른바 ‘8.3 사채동결 조치’에 대해 알아야 한다.
월남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1972년, 한국 경제는 심각한 불황의 늪에 빠져들고 있었다. 전쟁 경기가 막을 내린 데다 기업들의 투자가 너무 과열되는 가운데 부채가 급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박정희 정부는 기업이 빌린 사채를 3년간 동결하는 한편 연 16.2%의 이자만 받을 것을 명령했다. 당시 시중 사채금리가 50~60% 수준이었음을 감안할 때 엄청난 특혜였다.
그런데 더 문제가 된 것은 신고된 사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137억 원이 기업주가 자기 기업에 빌려준 사채라는 점이었다. 기업 경영에는 관심이 없고 회삿돈을 빼돌려 사채놀이를 하는 기업인들이 있다는 소문이 사실로 판명된 것이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악덕 기업인을 단죄하라는 여론이 들끓었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적 견지에서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해 준 기업의 경영자까지 위장 사채업자에 포함된 것을 보고 14명의 기업인을 횡령과 배임 등의 혐의로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더 나아가 정부는 사채 동결로 기업의 경영난이 완화된 만큼 기업이 더 이상 사주 개인의 것이 아니라며 기업을 주식시장에 상장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증권거래소는 투자자 보호를 명분으로 상장 공모가를 결정할 때 액면가(500원)를 넘지 않도록 규제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액면가의 10% 이상을 배당하도록 의무화해 놓았기에 기업들이 정부의 요구에 순순히 응할 리가 없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에 공개 대상 기업을 지정해 기업 공개를 강력히 촉구하는 이른바 ‘5.29 특별 조치’를 내렸다. 당시 한국은행 부총재는 “지금까지 기업이 망해도 기업인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통념처럼 되어 왔다. 그런 무책임한 사고방식은 이제 버릴 때다. 기업이 망하면 기업주도 망하는 게 당연하다. 기업도 자립·자조·협동하는 새마을 정신을 가지라는 것이 이번 기업 공개 촉구의 진의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상의 내용의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의 오너들은 1972년 사채 동결 조치로 큰 이익을 본 대신, 1974년 강제 상장 조치로 자신의 지분을 헐값에 상장하는 피해를 입었다. 특히 한국은행 부총재의 지적처럼 오너들은 기업이 어려움을 겪을 때 언제든지 자신의 재산을 헌납해야 한다는 부담을 짊어지게 됐다. 오너의 독보적인 지위는 1997년 더욱 반석 위로 올라섰다. 당시 대농그룹이 보유한 백화점, 미도파에 대한 신동방 그룹의 인수 시도에 대해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경영 합리화 목적이 아닌 경영권 탈취를 목적으로 하는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해 직접 개입하겠다”고 나선 데 이어, 감독 당국이 신동방 그룹과 함께 미도파 주식을 사들인 성원그룹에 대한 조사에 착수함으로써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 이후, 한국 증시에서 오너의 권한은 외부인이 관여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 되고 주가도 손쉽게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상속 및 증여세 부담을 줄이고 싶은 기업들은 배당을 삭감하고 잠재적인 악재를 적극 알림으로써 주가를 순자산 가치의 10분의 1 수준 밑으로 떨어뜨리며, 반대로 자금조달의 필요성을 느끼는 기업들은 물적 분할은 물론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신사업 진출 뉴스를 퍼트리며 주가 부양에 나서곤 한다.
따라서 당국이 경영난을 겪는 기업의 오너에게 ‘사재출연’을 요구하고 오너들이 범접 불가능한 지위를 행사하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한국의 주주 보상이 선진국 수준으로 높아지기를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다행히 최근 정부가 밸류업 프로그램을 적극 추진하니 한국 주식시장에 존재하는 구조적 문제에 대해서도 함께 신경을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홍춘욱 프리즘투자자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