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사상 첫 정권교체가 이뤄진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의 향방은 ‘DJP 연합’이라고 알려진 당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공동전선에 달려 있었다. DJP 연합이 실제로 성사된 것은 그해 11월 3일이었지만, 두 거물 정치인의 단일화 논의는 이미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었으며 그 흐름을 가장 먼저 확인한 매체는 역시 한국일보였다.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DJ와 JP가 '야권 단일화 합의문'에 최종 서명하기 일주일가량 전인 10월 28일 자 한국일보 1면에 두 사람의 회동을 알리는 특종 기사가 게재됐다. 특종 기사에서 한국일보는 김대중 총재가 김종필 총재의 서울 청구동 자택을 비밀리에 방문해 단일화 협상을 매듭지었다고 보도했다. 김대중 총재가 단일후보가 되고 김종필 총재가 조각권을 가진 공동 정권의 국무총리를 맡기로 했다는 합의문 내용도 전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이뤄진 DJP연대를 토대로 세를 불린 김대중 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한국일보가 정치 특종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건 끈질긴 취재망의 가동 덕분이었다. 한국일보는 당일 밤 정치부 기자 중 유일하게 김대중 총재의 일산 자택을 지키고 있다가, 사건기자 등의 도움으로 관련 정보를 입수해 김종필 총재와 만나고 돌아온 김대중 총재에게 메모를 넣어 회동 사실을 포착할 수 있었다.
한국일보 특종은 정가와 경쟁지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역사적 특종을 놓친 경쟁지들은 대선전이 가열되는 와중에 야당 반장을 교체하는 등 출입처 개편을 단행했다. 일부 신문들은 이후 ‘DJP 단일화’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성 기사를 내보냈는데, 낙종에 따른 분풀이 성격이 강하다는 분석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후문이지만, ‘DJP 후보단일화’ 서명식 행사에서 김대중 총재가 이례적으로 유감을 표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대중 총재는 당시 야당 전담 기자들에게 “미안하다. 친구 집에 사적으로 조용히 찾아간 것이 이렇게 영향을 끼칠 줄 몰랐다. 나 때문에 몇몇 기자들이 곤경에 처한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자민련 안택수 대변인도 11월 4일 오전 출입기자들을 당사 근처의 음식점으로 초청, “마음 편하게 먹고 잘 지내자”며 건배를 제의했다. ‘DJP 회동’ 특종 이후 조성된 일주일가량의 긴장 정국은 한국일보의 특종 파괴력을 그만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