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 고위급 관료가 이란에서 만났다. 최근 러시아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방북을 계기로 북한과 '유사시 지체 없는 군사지원'을 약속하면서 한러 관계가 파탄을 경고할 정도로 틀어졌지만 대화 채널은 가동한 것이다.
외교부는 24일 정병원 차관보가 전날부터 이란에서 열리고 있는 아시아협력대화(ACD) 외교장관회의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회의에는 지난 2월 방한했던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도 참석했다. 푸틴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을 체결해 한반도 안보위협이 가중된 후 한러 양국의 첫 고위급 접촉이다.
다만, 외교부 관계자는 "별도 면담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을 아꼈다. 러시아 측이 먼저 제안하지 않는 이상 우리 정부가 먼저 말을 걸어 현안을 논의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러 조약 체결로 한반도 안보지형이 엄중해진 만큼, 정 차관보는 회의를 계기로 루덴코 차관뿐 아니라 참가 회원국들에 북러 군사협력에 대한 우려를 표명할 가능성이 크다. 다자회의는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국가들이 갈등을 풀거나 갈등 관리를 위한 외교적 공간으로 활용돼 왔다. 앞서 우리 정부는 쿠바와의 수교를 추진하면서 유엔 중남미카리브경제위원회(ECLAC) 총회를 비롯해 다자회의를 활용한 전례가 있다.
이석배 전 주러대사는 "북러 조약이 격앙될 만한 사건이긴 하지만, 러시아 측의 의도를 정확히 듣고 고위급 대화를 통해 위기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며 "다자회의를 이용해서라도 고위급 대화가 이뤄질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어 "북러 조약으로 한러관계가 완전히 붕괴되지 않았고, 북러 관계는 여전히 취약하다"면서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도록 외교적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ACD회의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국가와 동북아 3국(한중일)이 중동과 아시아 권역 전체의 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2002년 출범시킨 회의체다. 최근 회원국인 중국과 러시아는 이 회의를 아시아 권역에서의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 연대를 강화하기 위해 적극 활용하고 있다. 한국은 통상 차관보를 보냈지만, 외교부 홈페이지에는 지난 2019년 15차 ACD 회의까지만 기록이 남아 있다.
더구나 이번 ACD회의 개최국인 이란은 러시아가 북한 다음으로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을 맺으려는 상대다. 지난달 이란 정상과 외무장관 등의 헬기 추락 사고로 협의가 중단됐지만, 대선 이후 러시아는 조약 체결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러시아를 축으로 북한과 이란의 3각 군사협력 우려가 커지는 대목이다.
19일 푸틴 대통령 방북 이후 북한과 군사동맹에 준하는 수준으로 북러 관계가 격상되면서 한러 관계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장호진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장은 북러 조약 내용이 공개되자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재검토할 예정"이라고 경고했다. 그러자 푸틴 대통령은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제공하면 아주 큰 실수가 될 것"이라고 맞받아쳤다. 이에 장 실장은 재차 "러시아가 하기 나름이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 과정에서 김홍균 외교1차관은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러시아대사를 초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