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합니다.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 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집니다."
1993년 8월 12일 오후 7시 45분. TV와 라디오로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 담화가 전국에 생방송됐다.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명령’이었다. 대통령 발표 후 15분 뒤인, 그날 오후 8시부터 실명제가 시행됐고, 다음 날부터 차명이나 가명으로 예치됐던 돈을 찾기 위한 실명제 등록이 실시됐다.
김 전 대통령의 조치가 나오기 전까지 한국 사회에서는 차명이나 가명으로 은행에 돈을 맡기거나 투자할 수 있었다. 금융실명제의 필요성은 그 이전부터 논의되어 왔지만, 김 전 대통령 결단에 의해서 가능했다. 전두환 정권도 1982년 검토했으나, 포기했다. 정치자금이 투명해질 경우 통치기반이 약화될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금융실명제는 전광석화로 이뤄진 김영삼 정부의 대표적 개혁정책이지만, 한국일보는 해당 내용을 4개월 전 특종 보도했다. 언제 발표할 것인지 특정 일자만 적시하지 못했을 뿐, 발표 방식과 주요 골자를 정확히 맞췄다. 게다가 당시 대부분의 관측(1994년 이후 실시)과 달리 연내 시행될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도 함께 전했다. 다음은 1993년 4월 13일 자 ‘금융실명제 시행-어느날 갑자기 세상이 놀란다’의 주요 부분.
금융실명제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 ‘전격실시’로 굳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가령 어느날 갑자기 김영삼 대통령이 긴급 담화를 발표, 모든 금융기관에 대해 신규 금융거래를 반드시 실명으로 처리하도록 지시하는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 (중략)… 실명제는 의외로 금년 안에 실시될 가능성도 큰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집권 중반기 이후에 과실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실명제를 빨리 시행하는 게 정치적으로 득이 된다는 계산에서다.
1993년 여름 금융실명제는 최고 보안 속에 논의·진행되고 있었다. 대통령 경제수석도 예상치 못했고, 여당과 야당 등 모든 정치인이 논의과정에서 배제됐다. 그런데도 한국일보가 정확한 예상을 내놓을 수 있었던 건, 한국일보 특유의 취재력 때문에 청와대부터 과천 관가 핵심 관계자까지 다양한 취재원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일보는 1997년과 1998년 외환위기 전후에도 경제정책을 둘러싼 긴박한 움직임을 경쟁 매체보다 앞서 전달할 수 있었다.
※연재 일정상 70개 특종 가운데 50개를 선별 게재하기 때문에, 일부(예: <27>한보 추가대출 당국 개입·한보 탈세 혐의·1991) 특종은 소개되지 않습니다. 독자님들의 양해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