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효 다한 '공정 수능'... "시대 선도 창의력 이끌어내게 수업도 평가도 혁신해야"

입력
2024.07.0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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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위기 맞은 교육 ②]
교육 전문가 15인 미래교육 방향 제언
수능 점수 만능주의서 교육·평가 다양화로
취약계층 진학 기회 확대로 교육격차 완화
미래교육 방향은 자기주도·협력 강화 학습
교육개혁은 교육 넘어선 사회구조 개혁
입시경쟁 유발 대학 서열 완화 시동 걸 때

편집자주

인구소멸과 기후변화 등으로 구조적 위기가 닥쳐오고 있지만 5년 단임 정부는 갈수록 단기 성과에 치중해 장기 과제는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입니다. 정권교체마다 전 정부를 부정하는 정치적 갈등으로 정책적 혼선도 가중됩니다. 한국일보는 창간 70주년을 맞아 이런 문제를 진단하면서 구조 개혁을 이루기 위한 초당적 장기 전략을 모색하는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잘 가르치는 교사란?" (윤희태 서울 영동일고 교사)
"시험에 나올 걸 단기간에 최대한 잘 설명해주는 분이죠."(학생들)

윤 교사는 우리나라 학교 수업이 평가의 그늘에 가려진 현실을 학생들과 나눈 대화 한 토막으로 전했다. 짧은 시간 최대한 많은 교과 지식을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 교실. 그 빈틈 없는 공간에서 교사의 수업 내용에 질문하거나 의견을 내는 학생은 '이단아'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생성형 인공지능(AI) 도구에 질문을 잘 해야 성과를 낼 수 있고 AI에 대체되지 않으려면 인간 고유의 창의적·비판적 사고력을 키워야 하는 시대. 질문이 사라진 교실은 과잉 경쟁을 유발하는 대학 입시의 틀에 갇힌 한국 교육의 현주소다. 설상가상, 초저출생에 따른 학생 수 급감이라는 위기까지 겹쳤다.

"우리 교육이 더 이상 이래선 안 된다.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도록 성적과 관계없이 모든 학생의 잠재력을 키워줄 과감한 시도를 할 때다." 지난해 국회미래연구원의 '좋은 사회로의 대전환-쏠림에서 개성사회로' 보고서의 진단대로, '이중 위기'에 처한 교육 정책은 이제 근본적 재설계가 불가피하다. 한국일보는 창간 70주년을 맞아 전문가 15명에게 교육 대전환의 길을 물었다.

'수능=공정' 허상 벗어나 수능 영향력 줄여야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의 영향력 축소는 대다수 전문가들이 첫손에 꼽은 과제다. 수능이 '공정성'이란 굴레에 매여 시대 변화와 동떨어진 주입식 교육을 강제하면서 학생의 창의적 사고력, 문제해결 능력, 잠재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다. 윤 교사는 "학생 평가의 중심이 공정성에서 다양성으로 전환해야 창의적 문제 해결력을 키워주는 수업으로 변화할 수 있다"고 했다.

나아가 전문가들은 '수능은 객관식이라 공정하다'는 인식이 허상은 아닐지 냉정하게 따져보자고 주문했다. 시험의 공정성을 '입시 부정 예방'과 동일시하는 건 단편적 생각이며, 시대가 요구하는 역량을 측정할 수 있다는 교육적 타당성과 신뢰성이 모두 충족돼야 공정한 평가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공정성에 대한 이해가 높아져야 대입 제도의 타당성·신뢰성 확보와 대학의 학생 선발 자율성 사이에서 합리적 균형점을 찾는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해진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수능 설계자' 박도순 고려대 명예교수는 수능이 변질돼 평가 도구로서 교육적 타당성이 약화했다고 진단했다. 수능이 1993년 도입 당시 취지였던 '통합교과적 사고력 측정'에서 벗어나 암기 위주 문제로 치우쳤다는 것. 박 교수는 "처음 수능을 설계했을 땐 암기로 답할 수 없는 문제가 출제되기를 원했는데 이제는 기억에 의존하는 문제가 너무 많아졌다"며 "잊어버릴 만한 걸 평가해 점수가 높은 사람을 뽑는다는 건 그야말로 난센스"라고 일갈했다.

박 교수는 교육과정 일부만 다루고 잠재력 평가와 거리가 있는 지금의 수능을 중심으로 대학이 학생을 선발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했다. 그는 "어떤 학생은 (수능 표준점수 합계가) 398점이라 의대에 합격하고 다른 학생은 390점이라 의대에서 떨어져 재수·삼수하는 게 공정이냐"며 "점수 차가 그 정도인 학생들의 실력은 (통계적) 오차범위에 있다고 봐야 하고, 오차범위 안에서 공정한 선발 방식은 무작위 표집"이라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은 수능 영향력을 줄이고 다면평가, 심층(면접)평가를 강화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장지환 배재고 교사는 "점수 위주 평가는 학생들이 내적 동기와 자기 성장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수능과 내신 점수를 잘 따는 '전략적 접근'에 치중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정답 찍기 대신 논리 전개... "매년 5%씩 서술형 확대를"

논술·서술형 문제 도입도 미룰 수 없는 대입 개편 과제로 꼽힌다. 이혜정 교육과학혁신연구소장은 "수능은 '다음 중 적절한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은'만 묻는다"며 "학생이 자기 생각과 관점을 설득력 있게 쓰고 말하는 역량을 기를 기회를 원천 차단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국제 바칼로레아(IB) 프로그램 벤치마킹을 대안으로 추진하고 있다. IB는 국제인증 프로그램으로 토론형·프로젝트형 수업 및 논술·서술형 절대평가에 바탕을 둔 교육 체제다. 관건은 채점의 공정성 확보. 이 소장은 "정성평가를 채점하는 노하우를 교사들이 축적한 다음 '한국형 바칼로레아'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했다. 이 소장에 따르면, 전국 17개 시도교육청 중 11곳이 IB 한국어판 프로그램 도입 협약을 맺었고 대구, 제주 등에선 일부 학교가 IB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입시는 매우 민감한 제도인 만큼 긴 호흡으로 서술형을 늘려가자는 제언도 있다. 일본의 경우 2021년부터 서술형 문항이 포함된 시험을 새로 도입하려다 채점 여건을 단기간에 마련하기 어렵다는 한계에 부딪혀 접은 일이 있다. 김도연 서울대 명예교수는 "10년 계획으로 1년에 5%씩 주관식 문항을 늘려 10년 뒤 비중이 50%가 되게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도 못할 이유가 없다. 프랑스 바칼로레아는 도입된 지 200년도 넘었다"는 격려도 덧붙였다. 안선회 중부대 교수는 "국어 일부를 논술형으로 해보고 잘 되면 확대해볼 만하다"며 "평가의 공정성은 교사들이 서로 다른 지역 학생을 채점하는 '교차 평가'를 통해 확보할 수 있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한 명 한 명이 소중" 교육 격차 감안해 진학 문 넓혀야

'개천용'은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른 교육 격차로 사라져 가고 있다. 서남수 전 교육부 장관은 저서 '대입제도: 신분제도인가 교육제도인가'(2022)에서 "수능은 고액 사교육을 받을 만큼 형편이 좋거나 문제풀이 준비를 잘 할 수 있는 학교나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이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 것은 주요 대학 입시 결과가 뒷받침한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학령인구 급감 위기에서 학생 하나하나가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대학 진학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래야 교육의 공정성도 실질적으로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수는 "지역균형 전형,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 등을 '실질적으로' 활성화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대가 2005학년도 입시에 처음 도입한 지역균형 선발 제도의 경우 서울대 입학생 출신 고교 수가 확대되는 효과도 냈지만, 선발된 학생의 과반이 수도권 출신이라 잠재력 있는 지역 인재를 뽑는다는 취지를 살릴 필요가 있다. 서 전 장관은 "계층 간 교육기회 균등, 사회통합 과제는 정부보다 대학이 나서야 더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대학의 역할을 강조했다.

대학이 특정 고교 출신의 선발 비율을 제한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특히 특목고와 자사고는 고교 다양화 명분으로 도입된 뒤 정시 중심으로 대입 경쟁 우위를 점하는 '패스트트랙'이 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박 교수는 "특목고, 자사고 등이 명문대 입시 통로로 변질된 상황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미래교육 나침반은 협력과 자기주도 학습

학교가 지식 전달 위주 수업에서 벗어나 학생들이 학습을 주도해 나가는 역량을 길러주고 학생 간 협력으로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가도록 장려하는 교육 체제 혁신이 절실하다는 제언도 잇따랐다.

이장원 교사노조연맹 사무총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9년 발표한 '학습 나침반 2030'에서 강조한 대로 '학습자의 행위 주체성'(스스로 유의미한 방향을 잡고 학습하는 역량) 향상을 미래교육의 핵심으로 꼽았다. 이를 위해서는 "획일적 지식 중심에서 개별성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교육 체제로 전면 혁신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사무총장은 "1995년 김영삼 정부의 5·31 교육개혁도 '학습자 중심' 방향을 제시했지만 중앙집권적 시스템이 유지된 채 추진돼 창의성·자발성·다양성 지향 교육이란 방향성이 수사(修辭)에 그치고 말았다"며 "미래교육을 위해 교육행정기관도 분권화·다양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네스코가 2022년 발간한 '교육의 미래' 보고서에서 가장 강조한 '협력하는 능력' 배양도 여러 전문가가 꼽은 미래교육의 중요 지향점이다. 김도연 교수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을 인용하며 "우리는 지금껏 개인이 움직였고 교육이 그걸 부추겼다"며 "이제는 멀리, 함께 가야 할 때"라 강조했다.

단편적 교과 지식 전달을 넘은 통합·융합교육도 중요하다. 정철영 서울대 산업인력개발학과 명예교수는 "학생이 사회로 나갈 때 직종, 직위에 상관없이 필요한 자질과 역량인 직업기초능력을 함양시켜야 하는데, 국어·수학·사회 등이 교과별로 분절된 채 일방적 학습이 이뤄져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교과별 이기주의로 구획을 나누기보다 학생이 필요한 영역을 통합·융합해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금융교육 등 사회 생활의 필수 콘텐츠를 교육에 반영할 때라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 배상훈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 함수(수학)와 지리, 역사도 중요하지만 시민교육, 정치교육, 금융교육 등 급변하는 사회에 요구되는 교육과정을 새롭게 정의 내려야 할 때"라 했다. 오세희 인제대 공공인재학부 교수도 "금융교육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만큼 일회성 교육이 아니라 국가교육과정에 넣어 어릴 때부터 경제·금융 관념을 갖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학도 인구 급감 시대에 백화점식 학과 운영 체제를 벗어나 특성화 대학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지적도 잇따른다. 지난해 출생아는 23만 명으로, 이들이 고3이 됐을 때도 대학 정원이 지금과 같다면 85%가 수도권 대학(현 정원 19만5,000명)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다. 소수 상위권 대학 쏠림 현상이 더욱 심화하면서 학생 유치가 힘든 대학들의 위기가 더 커질 거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정승렬 국민대 총장은 "4년제 대학의 백화점식 학과로는 생존이 어렵다"며 "교육 수요자가 원하는 걸 확실하게 특성화해 강점을 키우는 대학만이 비전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려면 "(정부에서) 대학에 학생 선발권을 비롯한 자율성을 실질적으로 부여해야 대학이 특색을 드러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야 대학들이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도 잠재력을 가진 학생, 교육 기회를 제대로 못 받은 학생에게 폭넓은 기회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 서열 완화' 시동 걸 때... 근본 해법은 사회구조 개혁

입시 경쟁을 부추기는 원인으로 지목되는 대학 서열화를 타파하기 위해 정책적 시동을 걸 때라는 전문가 지적도 적지 않다. 송경원 사교육걱정없는세상(사걱세) 정책실장은 "우리 교육사(史)에서 학벌주의를 실제로 개선하려는 정부 차원의 정책적 시도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며 "몇몇 대학을 상향 평준화하는 방향으로 재정을 투입하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대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국립대 통합 네트워크'다. 서울대와 지역거점국립대 9개교를 하나의 대학으로 만들고 기존 대학들의 경쟁력 있는 학과를 특성화하는 방식이다. 2003년 경상국립대에서 처음 안이 나온 이래 2007년 민주노동당, 2012년과 2017년 더불어민주당이 각각 대선 공약으로 제시했지만 사회적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진 않았다.

대학 서열 해소는 쉽지 않은 과제라 정책적 끈기와 과단성이 필요하다는 주문도 나왔다. 반상진 전북대 교육학과 교수는 "소수 명문대에 학생들이 쏠리는 병목 현상을 완화하려면 좋은 대학을 많이 만들 토대를 구축하는 큰 계획을 짜서 역량을 쏟아부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성준 좋은교사운동 대표는 "대학과 고교 서열화는 이미 많은 논의가 이뤄진 문제로, 답이 없다기보다는 답을 선택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사회의 교육 문제는 실타래처럼 엉켜 해법은커녕 인과관계조차 따지기 힘든 게 사실이다. 다만 교육문제는 교육을 넘어 사회 전반으로 시야를 넓혀야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음은 자명하다. 진정한 교육개혁은 곧 사회구조 개혁이라는 것, 교육개혁을 모색하는 전문가들의 공통적 대전제다. 한숭희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교육을 바꾸려 하기 전에 사회구조적 양극화, 불평등을 완화할 첫 단추라도 풀어야 교육 현장도 달라질 것"이라 했다.

"중장기 정책 제대로 설계하려면" 국가교육위 재편론

'국가 백년대계' 중장기 교육정책을 수립하는 국가교육위원회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며 개편 필요성을 제기했다.

국교위 기능 회복을 위한 조치로 위원 지명·추천 방식 개선이 우선 꼽힌다. 현행법상 국교위는 위원장과 상임위원 2명을 포함해 총 21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대통령이 위원장 등 5명을 지명하고, 국회가 여야 몫 상임위원 1명씩을 포함해 9명을 추천한다. 정치권이 위원 3분의 2를 정하는 셈이라, 정파적 인사들이 국교위에 대거 입성해 진영 논리로 갈등을 일으키면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위원 인선에서 정당 추천 몫을 줄이자는 견해가 적지 않다. 송경원 사걱세 정책실장은 "지난 국회에서 국교위설치법을 밀어붙인 더불어민주당이 결자해지 차원에서 국교위가 제 구실을 원활히 하도록 법률을 개정해야 한다"고 했다. '교차 추천제'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박남기 교수는 "(여야) 투사들만 배치돼 쌈박질하는 일이 없게 여야가 함께 위원 선정을 하자"며 "대통령·여당과 야당이 각각 5배수로 후보를 추천해 상대가 고르게 하는 방식이 나을 것"이라 제안했다.

실무 인력 보강도 국교위 강화 필수 요건으로 꼽힌다. 국교위 실무진은 1처 3과(사무처· 교육발전총괄과·교육과정정책과·참여지원과) 33명뿐이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 5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국가교육과정의 기준과 내용을 고시하는 교육과정정책과 인원이 10명인데, 이들이 유치원과 초중고의 모든 교과 교육과정 사무를 관장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교육계에선 국교위 직원을 현재의 2배 이상인 70~80명으로 늘려야 한다고 본다.

손현성 기자
홍인택 기자
최나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