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러 정상회담 이후 한국과 러시아가 살얼음판을 걷기 시작했다. 정상회담 다음 날, 북한이 기습 공개한 1961년 '조소 우호조약'에 버금가는 조약문이 트리거 역할을 톡톡히 했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던 정부는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원칙 재검토' 방침을 어렵사리 내놨고, 푸틴 대통령은 "살상무기 지원은 아주 큰 실수"라며 한 단계 높은 강도로 맞받아쳤다. 전쟁 중인 러시아와 대화 자체가 어디로 튈지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향후 메시지 수위 관리가 정부의 숙제로 대두됐다는 지적이다.
대통령실은 21일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과 관련해 "다양한 방안들이 고려될 수 있고, 구체적 방안은 전날 우리 측 입장에 앞으로 러시아 측이 어떻게 응해 오는지에 따라 검토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전날 러시아를 향한 규탄 성명과 함께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재검토하겠다"고 경고한 것과 비교하면, '살상무기'라는 표현을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채 '전략적 모호성' 측면을 보다 부각한 것이다.
이는 일단 여론의 추이가 심상치 않아서다. 대통령실의 경고 발언이 나온 직후부터 우크라이나가 과거부터 요구해온 155㎜ 포탄부터 대공 방어용 천궁-Ⅱ까지, 한국이 지원할 무기의 종류가 구체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대통령실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지만, "탄약 지원을 우선 검토한다"는 보도까지 등장했다.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는 여론이 급속히 확산되는 것에 일단은 진화가 필요하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러시아의 셈법을 예상하기 어렵다는 점도 일정부분 고려가 됐다. 당장 공개된 조약문의 수위조차 예상하기 쉽지 않았다는 후문이 들려온다. 당초 '자동 군사개입' 조항 부활이라는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긴 했지만, 19일 회담 직후 '신중 모드'로 말을 아낀 이유는 '동맹'이라는 말을 아끼는 푸틴 대통령 발언에 어느 정도 안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날 공개된 실제 조약문은 '유엔헌장 51조와 양국 법'이라는 완충 장치를 제외하면 1961년 자동 개입 조항과 유사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이달 초 국제경제포럼(SPIEF)에선 무기 지원 문제에 대해 한국에 감사의 뜻을 보낸 푸틴 대통령에게서 북러 조약문에서 북한 요구를 상당 부분 들어준 푸틴 대통령을 예측하기도 쉽지 않았다.
문제는 앞으로의 '스탠스'다. '강대강'으로 러시아에 계속 대응할 경우 우크라이나 무기 지원 논의가 수면 위로 올라올 수밖에 없고, 결국은 한러 갈등이라는 원치 않는 파편이 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푸틴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러시아는 다른 지역에 무기를 공급할 권리가 있고 북한도 배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까지 해 온 상황. 자칫 무기 지원 신경전이 정부가 주시하는 '대북 핵심 군사 기술 및 무기 지원'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전문가들은 '말'을 통한 규탄 메시지를 이면으로 러시아와 정확한 소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서로의 '레드라인'을 확실히 전달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석배 전 주러시아 대사는 "러시아도 북한에 민감한 군사 기술을 주는 것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우리 역시 살상무기 지원 부분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한미일 안보협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러시아와도 북러 회담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 계속 소통하겠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