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마음이 그러한 이야기를 원하는 까닭이다.”
‘신수(神獸·신령스러운 짐승)’를 주제로 삼은 앤솔러지 ‘원하고 바라옵건대’의 후기에서 읽은 문장이다. 이 말을 곱씹었다. 사람들은 왜 속이 선뜩해지는 이야기를 일부러 찾을까. 어째서 괴물과 인외(人外·비인간)에 매혹되고 초자연적인 존재를 상상할까. 현실 이면의 세계가 침입하는 내용을 찾아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로 우리는 때때로 그러한 이야기를 원한다. 거대 괴수나 외계 생명체가 등장해서 도시를 파괴하는 이야기. 신령하거나 불길한 존재가 인간 사회를 뒤트는 이야기. 형언할 수 없는 무엇이 흘끗 나타나 일상을 압도하는 이야기. 우리는 허구를 통해 한순간이나마 보잘것없는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기를 원한다.
‘원하고 바라옵건대’ 중 이산화의 ‘달팽이의 뿔’에는 ‘곤(鯤)’과 ‘붕(鵬)’이 등장한다. 본래 장자(莊子)의 ‘곤’은 길이가 몇천 리인지 알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물고기로, 하늘로 뛰어오르면 새로 변해 ‘붕’이 된다. 붕 역시 극히 거대하여 날갯짓 한 번에 구만리를 가고, 6개월에 한 번 휴식을 취한다. 이들은 인간으로서는 감각할 수조차 없는 시공간을 유영한다. 소설은 여기에 곤을 사냥하는 사냥꾼 무리를 더한다. 하늘로 뛰어오르는 순간 곤의 부레를 찔러 공기를 빼면 잡을 수 있다. 곤의 비늘은 철이라 뜯어다 팔면 돈이 된다. 다만 욕심을 부리다 곤과 함께 하늘로 올라간 사람은 돌아오지 못한다고들 한다. 하늘로 올라갔던 ‘택사’ 노인은 어쩌다 살아서 내려왔지만, 그날로 미쳐버렸다.
택사 노인이 미친 이유는 너무나 많은 진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하늘 높이 올라간 자는 멀리까지 내다본다. 평소에는 인지하지 못하던 규모의 세상을 인식한다. 인간은 곤에 비하면 자그맣고, 바다에 비하면 보잘것없으며, 어쩌면, 어쩌면…. 이런 비교는 한없이 이어질지도 모른다. 소설은 동양의 환상으로 시작하는 코즈믹 호러이고, 우주적인 규모의 시공간이 자아내는 공포를 그린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코즈믹 호러의 공포는 매혹과 찬탄을 동반한다. 이는 현실의 얇은 막 뒤에 자리하는 압도적인 규모의 비현실을 선보임으로써 오히려 우리가 현실의 무게에 압사하지 않도록 돕는다.
현대 한국인의 일상생활에는 신수가 나타날 자리가 없다. 산군(山君)이었던 호랑이는 멸종 위기에 몰렸고, 비를 뿌리는 응룡(應龍)을 찾는 대신 인공 강우를 개발했다. 신비, 경외, 미지가 있었던 자리는 인간과 인공물이 빈틈없이 차지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허구의 세상으로 들어가 잠시나마 비대한 자신을 내려놓는다. 그런 점에서 김주영의 ‘죽은 자의 영토’에 등장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는 대답도 기억에 남았다. 기이함이 ‘그냥 평범한’ 것으로 전환될 때, 허구는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는’ 것으로 우리에게 스며든다. 이는 인간이 모르는 세상, 현실과는 다른 규칙이 있다는 환상을 야기한다. ‘원하고 바라옵건대’는 짐승이면서 신령하다는 이중성을 지닌 신수를 통해 겸허히 귀 기울일 이야기를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