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가 고향의 회당에 가서 직접 성경 구절을 읽었다. 그 기록이 누가복음에만 언급돼 있는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의 성자가 예수고, 경전은 성경이다. 이 둘의 만남은 의미심장 그 자체다. 심오한 신학적 진술이었을까? 신비한 영적 묘사였을까? 예수는 이사야서의 몇 구절을 다음과 같이 읽었다고 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누가복음 4:18-19)
이사야의 예언을 빌려 자기 인생의 의미를 말씀하셨다. 그에게 주목받는 네 부류의 사람이 나온다.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그리고 눌린 자다. 예수는 애초에 뭘 얻거나 받을 생각이 아니었다. 오히려 절실한 사람에게 무언가 주려고 오셨다. 빈곤한 가정에 기쁜 소식을, 꽉 막힌 곳에 탈출구를, 아픈 사람에게는 치료를, 그리고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고매한 신학이나 신묘한 영적 가르침처럼 들리지 않는다. 매우 실질적이며, 얼핏 들으면 선거철에 흔히 들을 법한 정치인의 공약처럼 들린다. 꼬여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풀 수 있는 해결의 열쇠를 주겠다는 선언이다.
때때로 우리는 결산을 한다. 수입이 지출보다 많아야 안심이다. 그래서 인생은 그저 더 많이 받고 얻으려고 애쓰는 수고가 됐다. 예수를 통해 삶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면, 특히 신앙인의 인생은 받기보다는 주기에 더 큰 의미가 있어야 한다.
사람이 자신의 신앙을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신비한 영적 체험이나 깊이 있는 신학적 지식일까? 의외로 간단하다. 통장에서 자신의 지출 내용을 보고 내 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보면 답이 나온다. 나의 필요를 위해 썼던 지출이 아니라, 절실한 누군가를 위해 실질적으로 내가 주었던 지출이 얼마만큼인지가 곧 자신의 신앙이다. 카톡이나 문자로만 주었던 위로와 격려는 미안하지만 좀 모자란다.
신앙을 갖는 것은 매우 고유한 영적 체험이다. 그 체험을 통해 사람은 종교라는 신비의 영역에 참여한다. 이 신비가 삶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지만, 그렇게 시작하는 신앙의 삶이 현실을 등지고 초월적인 천사처럼 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실질적이어야 한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 말이다.
짓궂은 말을 하자면, 얻고 싶을 때 드리는 우리의 기도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반면 무언가 주고자 한다면 기도가 아주 추상적이기 일쑤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까지 우리에게 권면한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한일서 3: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