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 결혼 가능” vs “동성애자 사형”… 동남아 ‘사랑할 권리’ 극과 극

입력
2024.06.21 04:40
15면
<29>엇갈리는 성소수자 정책
태국·베트남 등 LGBTQ+ 활동 제재 안 해
브루나이·말레이에선 동성애 불법 처벌
"종교·정치' 장벽 높은 동남아에 큰 과제"

편집자주

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목요일마다 함께하세요!

#지난 9일 베트남 하노이의 한 복합문화공간. ‘세계 성소수자 인권의 달(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을 기념해 열린 ‘프라이드 온’ 행사장은 폭우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이른 아침부터 200여 명의 베트남인으로 북적거렸다.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성소수자(LGBTQ+) 관련 미술, 영상 작품을 관람하거나 ‘사랑은 사랑이다’ ‘사랑은 승리한다’ 등의 문장이 적힌 기념품을 구경했다.

가장 인기를 끈 부스 중 하나는 하노이 젠더의학센터(CSM) 상담 창구였다. 성소수자 전문 병원인 이곳은, 젠더와 섹슈얼리티 문제 관련 상담과 심리 치료, 생식 건강 관리 등을 담당한다. CSM 관계자는 “성정체성으로 혼란을 겪는 청소년과, 자신의 정체성을 인지해도 사회적 시선 때문에 스스로를 혐오하거나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꺼리는 이들, 질병을 숨기는 사람도 많다”며 “센터는 이들의 몸과 마음을 살피고 조언을 해주는데, 오늘도 많은 시민이 부스를 찾아 상담 예약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틱톡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동성 커플이자 베트남 마이크로 인플루언서(팔로워 수 10만 명 이하 유명인) 황(20)과 꾸안(32)도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꾸안은 “우리의 일상을 온라인에 공유하고 동시에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에서 운이 좋은 편”며 “다른 성소수자 커플들도 인정과 지지를 받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성별 치료나 동성애 처벌 폐지

동남아시아 10개국에서는 서로 다른 인종, 종교, 정치 체제만큼이나 성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도 큰 차이가 난다. 일부 국가에서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할 자유’가 보장되지만, 다른 나라에선 동성 간 사랑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성소수자 권리와 다양성에 가장 포용적인 국가로는 태국이 꼽힌다. 6월이면 주요 도시 곳곳에는 성소수자 지지를 의미하는 6색 무지개 물결이 인다. 수도 방콕에서 진행되는 10만 명 규모 퍼레이드에는 현직 총리를 비롯해 주요 정당 대표와 유력 정치인이 참여해 연대 의사를 밝힌다.

지난 18일에는 동성 결혼 합법화를 골자로 하는 ‘결혼평등법’이 압도적 찬성으로 상원을 통과했다. 그간 남성과 여성의 결합만이 결혼으로 인정받았지만, 앞으로는 성별과 관계없이 부부로 인정받게 된다. 그간 이성 부부에게만 적용됐던 유산 상속, 양육권 등의 법적 권리도 갖게 된다.

국제 인권단체 포티파이라이츠의 묵다파 양구엔프라돈 인권담당 변호사는 "동성 결혼 합법화는 태국 사회의 LGBTQ+ 문제 인식을 높이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견고한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라고 평가했다.

베트남도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비교적 열려 있는 편이다. 태국처럼 법적으로 동성 결혼을 허용한 것은 아니지만 지난해 미국 싱크탱크 퓨리서치센터가 진행한 조사에서 베트남 성인 65%가 동성결혼 합법화를 찬성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동남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진보적 답변으로, 태국(60%)보다도 높은 수치다.

2022년에는 보건부가 “동성애는 질병이 아니며, 치료될 수도 없고 치료가 필요하지도 않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매년 9월이 되면 하노이 중심가에서 성소수자 5,000여 명 이상이 참여한 대형 퍼레이드도 열린다. 프라이드온 참석자는 “일부 학교나 회사는 성중립 화장실도 마련했다. 점차 늘어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부모가 성소수자 자녀를 병원으로 데려가 성적 지향을 ‘치료’하려는 사례도 적지 않아 아직은 과도기라는 평가도 나온다. 2022년 베트남 매체 VN익스프레스는 현지 보건부 통계를 인용, “베트남 내 성소수자는 48만 명으로 추산되지만, 사회 분위기 탓에 커밍아웃을 꺼리는 사람도 많아 실제 규모는 훨씬 더 클 것”이라며 “LGBTQ+ 응답자의 40%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보건부 조사 결과도 있다”고 전했다.

필리핀 역시 성소수자에 대해 대체로 개방적인 국가로 꼽힌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은 재임 당시 대통령궁에 성소수자를 초청하고 동성 결혼 지지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싱가포르는 2022년 남성 간 성관계를 처벌하는 법을 폐지했다.


높은 종교, 정치 체제의 벽

그러나 여전히 동남아 내 많은 국가에서는 사랑이 ‘죄’가 된다. 무슬림이 다수인 국가는 성소수자에게 가장 엄격하다. 동남아시아의 대표적 이슬람 국가 브루나이는 2019년 4월부터 동성애를 저지르면 목숨을 잃을 때까지 돌을 던지는 잔인한 형벌인 투석(投石) 사형제를 시행하고 있다.

당시 유엔 등 국제기구와 인권단체가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현지 정부는 “처벌보다 교육과 억제, 예방 목적이 크다”고 항변했다. 이에 브루나이 내 성소수자들은 캐나다 등으로 망명에 나서기도 했다.


무슬림이 전체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인도네시아와 이슬람이 국교인 말레이시아도 성소수자에 부정적이다. 말레이시아에서 동성애는 최대 징역 20년에 처해질 수 있는 중범죄다. 지난해 5월 스위스 시계 브랜드 스와치가 성소수자 지지 의사를 밝히며 ‘무지개색 시계’를 내놓자 정부가 매장을 급습해 제품을 모두 압수하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내 생산, 수입, 유통, 보유도 금지했다. 같은 해 7월에는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음악 페스티벌에서 영국 밴드 ‘더 1975’가 당국의 동성애 규제를 비난하며 남성 멤버끼리 키스하자 행사를 취소하고 이 밴드 공연을 불허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는 현행법상 동성 간 사랑을 범죄로까지 규정하지는 않지만, 차별을 감추지도 않는다. 하원은 올해 5월 성소수자 관련 콘텐츠 제작·방영을 금지하는 방송법 개정 추진에 나섰다. 인도네시아에서 일하게 샤리아(이슬람 율법)가 적용되는 수마트라섬 아체특별자치주(州)의 경우 동성애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적발된 성소수자들은 수십 대의 태형에 처해진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도 동성 간 사랑을 불법으로 규정하진 않지만 차별적 시선은 마찬가지다. 동남아 성소수자단체 ‘아세안 소기 코커스’의 릴리 주르리아 책임자는 “태국, 베트남의 (LGBTQ+ 관련) 긍정적 움직임이 인근 국가에도 영향을 미치기를 희망하지만, ‘종교, 정치 체제’라는 장벽이 매우 높다”며 “동남아에서 성소수자 권리 향상은 큰 과제”라고 설명했다.


하노이·방콕=글·사진 허경주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