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대 이후 박서보, 이우환 등의 단색화가 세계를 휩쓸었다. 한두 가지 색으로 단순한 패턴을 반복해 그리는 단색화는 1970~1980년대 한국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화풍으로 자리 잡았다. 생물, 사물, 풍경 등 구체적 대상을 그리는 구상미술은 상대적으로 설 자리를 잃은 듯했다.
최근 들어 구상회화의 가치와 역할을 복원하는 시도가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최열 미술사가는 25일 "국내외에서 단색화가 인기를 끈 건 미술사적으로 검증된 것을 시장 입맛에 맞게 상품화한 결과였다"며 "단색화 열기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미술계가 대안을 발굴하고 모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립현대미술관(국현) 과천관에서 열리는 'MMCA 기증작품전:1960-1970년대 구상회화' 전시는 최근 5년간 국현에 기증된 1960~1970년대 작가 33명의 구상회화 153점을 재조명한다. 이건희컬렉션이 104점이고, 이병규, 김인승, 도상봉, 김형구 등 구상회화가 체계적으로 성장하고 뿌리내리는 데 기여한 모임 '목우회' 회원들의 작품들이 나왔다.
대상을 충실히 묘사한 구상회화는 한국 회화의 토양을 단단히 다졌다. 백자항아리에 꽂힌 활짝 핀 백일홍을 담은 도상봉(1902~1977)의 '백일홍(1970)' 등 초기 작품에선 사실적 표현 속에 작가의 개성과 시대적 맥락이 읽힌다. 방탄소년단(BTS) 리더 RM이 사랑하는 작가 윤중식(1913~2012)의 그림도 선보인다.
구상미술 재조명 흐름에 미술품 경매업체도 동참했다. 케이옥션은 26일 열리는 6월 경매에서 '근대를 수놓은 작가들'을 주요 섹션으로 정했다. 박수근, 도상봉, 박고석, 윤중식, 김인승, 최영림, 임직순, 권옥연 등 근대 구상미술 1세대 작품을 망라했다.
농사일을 끝내고 마을사람들이 함께 음악과 춤을 즐기는 모습을 담은 박수근의 '농악'이 단연 이목을 끈다. 경매 최초 시작가는 12억 원이다. 박수근은 1962년쯤부터 농악을 소재로 삼았고, 현재까지 알려진 그림은 7점이다.
서울대미술관에서는 치밀한 구상력과 정교한 묘사력을 갖춘 동시대 작가 12명의 그룹전 '미적감각'이 열린다. 세필로 점을 찍듯 꽃을 그리는 '세필 꽃화가' 김홍주의 대작 6점이 시선을 압도한다. 조나현 학예연구사는 "추상 작품은 의도적으로 제외했다"며 "그간 현대미술이 개념, 이론, 비평을 앞세워 감성은 폄하된 측면이 있는데, 이번 전시를 통해 직관의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의 힘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