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하면 카이스트와 삼성전자는 쉽게 떠올리지만 정부 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왜 이렇게 존재감이 없는 걸까? 이런 얘기를 하면 출연연은 발끈한다. 지금의 반도체, 이동통신 등 첨단산업에 출연연의 기여가 크다는 것이다. 인정한다. 58년 전 최초 민관협력 모델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성공이 지금의 출연연 체계를 만들었다. 또 대형연구시설을 활용해 차별화된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하는 혁신 성과가 나온 지가 오래됐다는 지적이 지속되고 있다. 그럼 출연연은 구시대적인 모델로, 그 효용을 다한 것일까?
국제정세는 그렇지 않다고 얘기한다. 주요 선진국들은 정부가 나서서 민관협력 모델을 활용하고 있다. 미국은 국방고등계획연구국(DARPA)의 성공을 DARPA-H 등으로 넓히고, 유럽연합(EU)은 Horizon Europe에 오픈사이언스 등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도 국가 전략기술 확보를 위해 출연연을 중심으로 혁신·도전 연구개발(R&D)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지금의 출연연이 세계적인 혁신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었는지 묻는다면, 그 구성원들조차 확신하질 못하는 것 같다. 획일적인 공공기관 관리체계에 묶여 우수인재를 영입·유지하지 못한 것은 오래된 일이다. 기관장이 출연금을 조정할 수 없다거나 기관 내 획일적 출연금 분배도 문제다.
출연연 혁신이 성공하기 위해 정부가 할 일이 있다. 출연연 임무를 명확히 하고 자율경영을 보장하는 것이다. 아무런 감시장치 없는 무조건적 자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감사 걱정 때문에 한번 정해진 연구목표를 못 바꾸는 현실로는 오늘날 급변하는 기술환경에 대응하긴 어렵다. 사람 뽑는 것도, 필요하다면 기관이 자율적으로 뽑을 수 있어야 한다.
출연연 역시 바뀌어야 한다. 정부 간섭을 탓하기 전에, 출연연은 임무를 상기하고, 대학·기업·정부, 나아가 국민과 스킨십을 늘려야 한다. 출연연이 혁신생태계 속 스스로의 역할과 정체성을 정립할 수 있을 때,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지위가 확보될 것이다.
정부와 출연연이 신뢰 속에서 자율경영하는 데 중요한 것은 실효성 있는 평가제도의 구축과 운영이다. 올해 '출연연 공공기관 지정해제'와 같은 조치를 보면, 출연연의 임무가 재조명되는 것 같다. 평가제도를 통해 출연연이 자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구성원에게 동기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출연연의 역할과 기여를 보여줄 수 있도록 평가지표, 방식, 환류체계가 제대로 개편돼야 할 것이다.
이달 말 출연연 혁신방안이 발표된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국가 혁신생태계 대변혁의 시대에 출연연이 국가연구개발기관으로서 입지를 다질 수 있도록 정부와 출연연이 합심하는 성공적인 정책이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