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 삼성 기밀 빼돌려 1000억대 소송 건 前 '특허 사령관'

입력
2024.06.18 16:55
삼성전자 퇴직 후 특허전문기업 차려
"소송으로 위협" 삼성 상대 특허 소송
검찰, 영업기밀 누설 혐의로 구속기소

삼성전자의 '특허 수장'으로 10년간 군림했던 전직 임원이 퇴직 후 빼돌린 기밀 문건을 활용해 친정에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했다가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졌다. 이 전직 임원은 "삼성을 실제 소송으로 위협하면 라이선스 협상에 유리해질 것"이라며 친정 기업을 상대로 돈을 뜯어내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중앙지검 정보기술범죄수사부(부장 안동건)는 18일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영업비밀 누설 등) 혐의로 안모 전 삼성전자 IP(지식재산)센터장(부사장)을 구속기소했다.

특허 전문 미국변호사인 안 전 부사장은 2010~2019년 특허관리기업(NPE·사들인 특허로 소송이나 라이센스 등을 통해 수익을 내는 회사)이 삼성전자를 상대로 낸 소송 방어를 주업무로 하는 삼성전자 초대 IP센터장을 지냈다. 그는 삼성전자가 애플이나 화웨이 등을 상대로 낸 특허 소송에도 깊이 관여한 '특허통'이다.

검찰에 따르면, 2019년 회사를 떠난 안 전 부사장은 이듬해 시너지IP라는 NPE를 차린 뒤 이듬해 미국 음향기기 업체 '테키야'의 특허 소송을 대리했다. 테키야가 삼성전자와 '라이선스 협상'을 맺어야 하는 상황에서 삼성전자 IP센터에 재직하던 직원을 통해 '테키야 보고서'를 빼돌렸다. 테키야의 특허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 및 대응방안 등을 정리한 문건으로, 삼성전자 핵심 기밀로 분류된 자료였다.

석 달간 보고서를 살핀 안 전 부사장은 "삼성을 실제 소송으로 위협해 유리하게 협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어 "테키야가 보유한 특허 10여 건을 삼성이 도용해 무선 이어폰인 '갤럭시 버즈' 등에 무단 활용했다"며 미국 법원에 특허침해소송을 내고, 매출액이 큰 휴대폰 관련 특허도 소송대상에 포함했다. 소송 합의금으로 9,000만 달러(한화 약 1,240억 원)를 요구했다.

삼성전자 사내 감사로 범행 덜미

안 전 부사장의 범행은 지난해 3월 삼성전자의 사내 감사에서 덜미가 잡혔다. 직원 이모씨가 접근 권한이 없는 '테키야 보고서'를 보관한 사실을 적발한 삼성은 곧장 이씨를 검찰에 고소했고, 수사팀은 이 보고서가 안 전 부사장에게 흘러간 정황을 포착했다. 아울러 시너지IP에 합류한 전직 삼성전자 IP센터 기술분석그룹장 조모씨의 주거지를 압수수색해 범행을 공모한 정황이 담긴 모든 통화녹음이 저장된 SD카드나 이메일 등을 확보했다.

안 전 부사장의 범행은 미국 법원에서도 지탄 받았다. '테키야-삼성전자' 특허침해소송 사건을 심리한 미국 텍사스 동부지법 재판부는 지난달 9일(현지시간) "원고(안 전 부사장)는 이전 부하직원이던 삼성전자 특허 담당 직원과 공모해 기밀자료를 빼돌려 소송에 이용했다"며 "부정직하고, 불공정하며, 기만적이고, 법치주의에 반하는 혐오스러운 행위"라며 소송을 기각했다. 이 판결 후 검찰은 넉 달 만에 안 전 부사장의 구속영장을 재청구해 영장을 받아냈다.

한편 검찰은 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이모 전 삼성디스플레이 출원그룹장의 '상납' 비위도 확인, 그를 이날 구속기소했다. 이 전 그룹장에겐 삼성디스플레이의 사내 특허 출원 대리인을 선정해 주는 대가로 한국·미국·중국의 특허법인으로부터 수년간 총 7억 원 상당을 받은 혐의(배임수재 등)가 적용됐다.

수사팀은 또 이 전 그룹장과 공모해 경제적 가치가 없는 일본 기업의 특허를 고가에 매입하고 그 중 3억 원 상당을 '리베이트'로 돌려 받은 혐의(업무상 배임)로 국내 최초의 NPE 대표 출신 김모씨도 이날 재판에 넘겼다. 김씨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의 한 대학원 소속 초빙 교수로 알려졌다.

강지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