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법원에는, 누군가를 살해하거나 강간한 사람과, 임금을 떼이거나 사기당한 사람과, 한때 삶의 전부였던 이와 헤어지려는 사람과, 이들을 악착같이 스토킹하는 사람과, 재산을 압류하려는 사람과, 평생에 걸쳐 장만한 집을 잃은 사람과, 그 집을 싸게 낙찰받으려는 무수한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변호사를 하다 법원에 온 지 18년째지만 이 좁은 공간에서 이렇게 다양하고 기구한 사건과 사람들이 오간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법원은 인간사에서 상정 가능한 모든 형태의 불행이 모이는 곳이다. '악과 불운을 매일 보면서 어떻게 인간애와 삶에 대한 낙관을 간직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늘 동료들 덕분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들 중 판사 아닌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법원 일반직 공무원은 사법행정, 기술심리, 기술, 관리운영 직군으로 분류된다. 사법행정 직군은 다시 법원사무, 등기사무, 조사사무, 전산, 통계, 법원경위, 사서, 통역, 행정사무, 속기, 보안관리 등으로 직렬이 세분된다. 2018년부터 비정규직 근로자(민원안내원, 환경관리원, 시설관리원, 사무보조원)가 공무직 근로자로 전환되어 근무하고 있다. 우리나라 공무원의 자질이 높게 평가받지만 법원 공무원은 그중에서도 뛰어나다. 약간의 운만 따랐다면 법대(法臺)에 앉아 있을 사람들도 많다. 직렬과 직급을 떠나 각자 영역에서 빛나는 이들은 부지기수다.
정년을 6개월 앞둔 등기주사보 오 계장님은 업무나 민원처리, 모든 면에서 탁월하다. 같은 과 후배가 평가하는 그는 '나무에서 피톤치드가 나오는 것처럼 긍정 에너지가 마구 흘러나오고, 덕분에 과원들이 민원에 시달리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며, 권한만 있다면 정년을 10년쯤 더 늘려주고 싶은 사람'이다.
육군부사관으로 5년, 대기업에서 10년을 일하다 경력직으로 입사한 전기서기보 이 실무관은 청사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공무원이 주는 안정감과 이미지가 좋아 지원했다는데, 실은 공무원을 많이 좋아하는 그의 장모님 영향이 컸다. 생각보다 대우가 좋지 않고, 대기업에 비해 예산과 인력이 너무 적어 놀랐다고 하면서도 그는 정말 열심히 일한다. 딴마음이라도 먹을까 봐 공무원은 적당히 일해야 오래 버틴다고 농반진반 조언했지만 그의 사전에 복지부동은 없다. 힘든 상황에서도 늘 싱글거리는 그를 볼 때면 공무원이든 아니든 장모님의 애정에는 한 치 흔들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날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출근한다. 해가 갈수록 이 불행의 골짜기에서 버틸 수 있는 명백한 이유를 실감한다. 내게 판사라는 직책은 18년 내내 이어지는 과분한 꽃길이다. 모든 것이 과분하지만, 무엇보다 과분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동료다. 가까운 주변 사람을 믿고 아끼는 태도는 공동체를 위해서도 무척 중요하다. "한 나무에게 가는 길은 다른 나무에게도 이르게 하고, 마침내 모든 아름다운 나무에 닿게 하기 때문이다."(숲, 최정례) 여기 좋은 사람이 많다고 느끼는 사람은 저기도 그럴 개연성이 높다고 인식한다. 동료애는 이렇게 확산하여 공동체 전체의 유대감을 강화한다.
'윤슬'은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일컫는 순우리말이다. 물비늘이라고도 한다. 윤슬은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윤슬에는 직렬과 직위도 없다. 균등해서 아름답다. 윤슬은 절대 홀로 빛나지 않는다. 고르게 섞여 반짝이니 훨씬 더 눈부시다. 부산에는 산에서도 윤슬을 볼 수 있다. 우리 법원이 있는 장산 중턱에는 222개의 윤슬이 매일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