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미술이 전쟁을 기록하는 결정적 다섯 순간을 3회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주에 이어 이번 글에서 프랑스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를 살펴보고, 다음 글에선 미국 워싱턴의 '베트남전 참전용사 추모비'와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비'를 다루고자 한다.
전쟁기념물 중 개선문만큼 강렬하게 승리의 감동을 시각화한 기념물은 없을 것이다. 개선장군의 시가 행진은 대로를 가로지르는 개선문을 통과할 때 최고조에 달한다. 바로 이때 개선문의 조각과 장식도 비로소 빛을 발한다.
개선문의 역사는 고대 로마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근대적 기원은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이라고 할 수 있다. 황제 나폴레옹은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806년 두 개의 개선문을 파리 샹젤리제대로 동서쪽 양끝에 계획했다. 카루셀 개선문과 에투알 개선문이 그것이다. 에투알 개선문이 크기가 압도적이어서 ‘파리의 개선문’ 하면 에투알 개선문을 떠올리게 된다.
높은 언덕 위에 위풍당당하게 건설된 파리 개선문은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 제국의 번영을 상징한다. 높이 50m에 폭이 45m로, 오랫동안 최대 규모의 개선문으로 기록됐다.
거대한 규모와 상반되게 개선문의 정면을 장식하는 조각상은 다소 얌전해 보인다. 파리 개선문은 1806년 계획됐지만 나폴레옹이 실각한 1814년까지 기초공사 정도만 이뤄졌고, 실질적 건설은 1830년 7월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입헌군주 루이 필리프가 진행했다. 개선문의 4면을 장식하는 4개의 부조 조각상은 1833~1836년에 제작됐는데, 파리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건설을 시작한 지 한 세대 후에야 완성된 것이다. 그 의미도 프랑스 혁명부터 나폴레옹 제위 기간에 일어난 전쟁에 대한 기념으로 확대됐다.
루이 필리프 정부는 개선문의 조각을 선택할 때 혁명과 승전을 직접적으로 찬양만 하기보다는 전쟁에 대한 반성까지 담으려 했다. 당시 프랑스 주요 당파의 입장을 적절히 고려한 듯한데, 이 때문에 다소 애매한 메시지의 조각들이 자리한다.
샹젤리제 거리에서 개선문을 바라보면 오른쪽엔 '1792년의 출정'이, 왼쪽엔 '1810년의 승리'가 있다. 프랑스 혁명 때 의용군이 마르세유에서 파리까지 행진하는 장면과 나폴레옹의 아우스터리츠 승전 이후 비엔나 조약으로 프랑스 제국이 번영을 누리는 장면으로 동쪽 면을 장식한 것이다. 라데팡스 쪽을 바라보는 개선문의 서쪽 면을 보자. 오른쪽엔 '1814년의 저항'이, 왼쪽엔 '1815년의 평화'가 새겨져 있다. 나폴레옹의 실각과 복귀, 워털루 전투 패배 이후에 찾아온 평화를 각각 상징한다. 크게 보면 서쪽 면은 반성과 성찰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개선문 지붕선을 따라 새겨진 157m 길이의 프리즈(건물에 새긴 가로띠 형태의 양각 장식)엔 프랑스 군대의 행진 장면이 담겨 있다. 그 아래 6개의 부조엔 나폴레옹이 거둔 중요한 승리 장면이 기록돼 있다. 개선문 안쪽에는 혁명기에 벌어진 전투 128개의 이름과 참전한 장군 660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거대한 4개의 부조 조각에는 조각가 3명이 참여했지만, 동일한 상하양단 구도여서 전체적으로 통일된 느낌을 준다. 상단에는 평화와 전쟁을 상징하는 신화적 인물을 배치했고 하단에는 역사적 메시지를 담은 군상을 표현했다. 크기도 13m 내외로 일치시켰을 뿐만 아니라 조각 양식도 기본적으로 고전주의를 기초로 했다. 고전주의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이 좋아한 미술 양식으로, 기둥 장식을 배제하고 기본적인 아치 구조만 드러낸 개선문의 건축 개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파리 개선문의 부조 조각은 혁명기의 역사적 사건들을 한 컷의 화면으로 요약하다 보니 대단히 우회적인 방식으로 역사를 기록했다. 예를 들어 4개의 부조 조각군 중 가장 예술성이 뛰어나다는 '1792년의 출정'에선 날개 달린 전쟁의 여신이 힘찬 손짓으로 아래의 의용군들을 인도한다. 무엇보다 의용군들은 고대 갈리아 전사의 복장을 하고 있어서 혁명군과는 크게 동떨어진 모습이다.
이 조각을 맡은 프랑수아 휘드(Francois Rude)는 들라크루아가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을 참고해 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개선문에 등장한 전쟁의 여신이 치켜든 손은 혁명기를 흔드는 자유의 여신의 자세와 일치한다. 차이가 있다면,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 주변에는 1830년 혁명에 참여한 다양한 계층의 시민군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고 개선문 부조에는 혁명군이 고대 갈리아 전사의 모습으로 신화화돼 있다는 점이다.
1792년 프랑스 남부 항구도시 마르세유에서 출발한 혁명 의용대가 오늘날 프랑스의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를 합창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자, 조국의 자녀들아, 영광의 날이 왔노라! 우리에 대항하는, 저 폭군의 피 묻은 깃발이 올랐도다”라는, 박진감 넘치는 리듬과 도전적인 핏빛 가사를 열창했다. 그 뜨거운 열기에 비하면 개선문 조각상은 사뭇 순화된 느낌이다. 신화적 구성과 고대인의 등장은 현실감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들라크루아가 시각화한 1830년 7월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은 루이 필리프 정부는 들라크루아의 혁명 그림을 3,000프랑이라는 큰돈을 주고 기꺼이 구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공공장소에 전시하지 않고 숨겨 놓았다가 몇 년 후 화가에게 조용히 돌려줬다고 한다. 들라크루아가 필치로 담아낸 혁명의 열기가 너무나 뜨거워 통치자의 눈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그림으로 보였던 것이다. ‘시민-군주(citizen-king)’를 표방했던 루이 필리프는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았으나 더 이상의 혁명을 원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 장병들에게 “제군들은 승리의 개선문을 통해 귀환할 것이다(Vous ne rentrerez dans vos foyers que sous des arcs de triomphe)”고 선언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약속대로 파리에 전례 없이 거대한 개선문을 세웠다. 그는 이 개선문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남대서양의 작은 섬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된 채 1821년에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나폴레옹의 시신은 1840년에 프랑스로 돌아갔고, 파리 개선문을 통과해 그의 마지막 안식처인 앵발리드로 향했다. 결과적으로 전쟁터에서 그가 장병들에게 던진 약속을 나폴레옹 스스로는 지켰다고 볼 수 있다.
7월 왕정으로 불리는 루이 필리프의 입헌군주제 체제는 분열된 국론을 모아보려 했다. 이 과정에서 황제파인 보나파르트주의자의 지지를 받기 위해 나폴레옹의 시신을 돌려받으려 했다. 이러한 루이 필리프 정부의 통합 노력이 나폴레옹의 약속, 즉 개선문을 건설해 그 문으로 당당히 귀환하겠다는 공언이 이행되는 데 있어 큰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루이 필리프의 주도하에 완성된 파리 개선문은 정치적 타협의 결과물이다. 혁명을 신화화하기보다는 혁명의 빛과 그림자 모두를 담아 냉정하게 바라보고 싶어 한 각계각층의 시선을 조각 군상 속에 담으려 했다. '1792년의 출정'은 공화파를 위한 메시지이고, '1810년의 승리'와 '1814년의 저항'는 황제파를 위한 배려이며, '1815년의 평화'는 왕당파를 위한 것이었다. 모든 목소리를 담으려다 보니 신화를 통해 중립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파리 개선문의 부조 조각은 거대한 크기에 비해 메시지는 우회돼 잘 들리지 않는다. 혁명의 열기는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법이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나면 혁명을 추모하고 기념하려는 목소리가 다층적 시선에 묶여 낮게 가라앉게 된다. 파리 개선문은 그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