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노숙자 '확' 줄어든 비결... "돈 없어도 '내 집서 발 뻗고' 자도록 하자"

입력
2024.06.2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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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별의 별의별 유럽: 시즌2]
⑦핀란드의 노숙자 감소 정책 - 주거 우선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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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1만 명→2022년 89만 명.'

유럽 노숙자 관련 비영리기구 페안차(FEANTSA)가 지난해 발표한 유럽연합(EU) 회원국 내 노숙자 규모다. 13년 사이에 서울 관악구 인구(올해 1분기 기준 48만1,958명)만큼 증가했다. 특정 국가만의 문제도 아니다. 페안차는 "불행히도 대부분 회원국에서 노숙자가 늘어났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흐름에서 '자랑스럽게' 벗어난 국가가 있다. 핀란드다. 핀란드 주택 정책을 관할하는 주택금융개발센터(ARA) 통계를 인용한 페안차 보고서를 보면, 2009년 8,150명에 달했던 노숙자는 2023년 3,429명으로 절반 이상 줄었다.

'특별한 비결'은 '하우징 퍼스트(Housing First·주거 우선)' 정책이다. '모든 노숙자에 대한 거주지 제공을 문제 해결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으로 요약된다. 핀란드는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2027년까지 장기 노숙자를 0명으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목표까지 세웠다. 장기 노숙자란 1년 이상 일정한 거처가 없거나, 3년 내 노숙 경험을 반복한 이를 뜻한다. 주택 공급 등을 담당하는 비영리기구 Y재단 인터뷰 등을 통해 주거 우선 정책의 철학 및 운영 방식을 살펴봤다.


"엥? 노숙자가 줄다 마네"... 문제는 '장기 노숙자'

핀란드가 노숙자 감소 정책을 본격적으로 펴기 시작한 때는 1987년이다. 초기 정책은 많은 국가에서 활용되는 이른바 '계단 모델'에 근거했다. 치료, 훈련, 교육 등 프로그램을 마친 노숙자에게 안정적 거처를 마련할 자격 또는 기회를 주는 형태다. 가령 알코올 중독자는 임시 시설에 머무르면서 중독 치료 프로그램 이수라는 '계단'을 올라야 집 계약 자격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 집은 '사회 구성원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한 데 대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정책 효과는 분명했다. 1986년 1만7,958명이었던 노숙자 수는 1999년 1만 명 아래(9,990명)로 떨어졌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노숙자 감소 속도가 눈에 띄게 둔화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장기 노숙자가 줄지 않는 게 문제였다. 계단 모델에서는 안정적 거처를 얻기 위해 여러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야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낙오되는 이들이 많았다. 앞에 놓인 계단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 그랬다.

이에 노숙자 추가 감소를 위해서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2007년 핀란드 주택부 장관이었던 얀 펠레르보 바파부오리가 과감한 개혁의 깃발을 내걸었고, '자격 없는 노숙자라도 자신의 공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의 하우징 퍼스트가 시작됐다. 기존 노숙자 정책은 물론이고 집을 구하려면 재산, 직업 등을 증명해야 하는 핀란드의 통상적 주거 계약 형태에서도 벗어나는 획기적 대책이었다.

정책 효과에 대한 의구심은 상당했다. 그러나 '헌법에 적힌 기본권에 주목하자'는 의견이 하우징 퍼스트 실행에 힘을 실었다. 해당 헌법 조항은 이렇다. "존엄한 삶을 위해 필요한 수단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은 필수적 생활과 보살핌을 받을 권리를 지닌다. 당국은 모든 사람의 주택에 대한 권리와 주택을 마련할 기회를 증진해야 한다."




"'하우징 온리' 아니다"… 핵심은 '집+α'

하우징 퍼스트는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 Y재단 등 비영리재단 간 협업으로 이뤄졌다. 신규 주택 건설 및 부지 매입, 이를 위한 자금 마련, 기존 노숙자용 숙소의 용도 변경, 정책 대상자인 노숙자 규모 확인 등을 유기적으로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협업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하우징 퍼스트가 단지 '주거지 지원'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정책 목표 자체가 노숙자를 거리에서 사라지도록 하는 게 아니라 '노숙자의 인간다운 삶 영위 및 자립 지원'에 있는 만큼, 초기 단계(계단 모델) 때 주거지 마련에 앞서 지원했던 치료, 훈련, 교육 등도 동일하게 제공된다. 공동체에 속할 수 있도록 '동네 쓰레기 줍기' 등 가벼운 모임을 만들고, 역내 교회·학교·기업 등과의 접촉 기회도 마련한다.

한국일보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Y재단 소속 사회복지사 유하 카힐라는 하우징 퍼스트 운영 방식 및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하우징 퍼스트를 '하우징 온리(Housing only)'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우징 온리로 해석되면 노숙자를 사회에서 고립시키는 결과만 낳을 수 있거든요. 하우징 퍼스트는 단일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노숙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총체적 접근으로 이해해야 해요. 집을 중심으로 각종 복지 혜택과 지원 인력이 모이는 거죠."

하우징 퍼스트에 거주하게 되는 노숙자도 일반 세입자처럼 월세를 내야 하지만, 돈이 없어도 일단 거주 자격이 주어지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일자리가 없는 이에게는 일자리를, 건강상 등 문제로 일할 수 없는 이에게는 필요한 복지 혜택을 연결해 주기 때문이다.

카힐라에 따르면 각종 재활 프로그램은 주거지에서 이뤄질 때 효과가 더 좋다. "거주지가 불안정한 이들은 참여하다, 말다를 반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정한 장소를 기반으로 프로그램을 전개하면 맞춤형 장기 지원이 가능합니다. 심리적 안정감이 사회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점도 정책 수용도를 높이는 원인인 듯합니다."

하우징 퍼스트는 2008년부터 부침 없이 운영되고 있다. 현재까지 6,000채 이상 주택이 공급됐다. 그 결과 2008년 목표했던 대로 장기 노숙자는 크게 감소했다. 2008년 3,500명 정도였으나, 2023년에는 약 1,000명에 그쳤다. 같은 기간 전체 노숙자 수도 7,960명에서 3,429명으로 57%나 줄었다. 카힐라는 "모든 정당이 '노숙자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핀란드는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집은 인권... 미래를 여는 공간" 경험자들의 증언

집을 구한 뒤 노숙자들의 삶은 실제로 달라졌을까. Y재단 관계자 인터뷰 및 보고서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44세 남성 A씨는 주택이 곧 '인간다운 삶의 기본'임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나는 한때 공원, 공중화장실, 재활용품 수거장, 자동차 등에서 살았고, 빈 병 등을 주워서 내다 팔았어요. 폭력은 삶의 일부였습니다. 강도를 당하기도 했고요. 노숙 생활을 할 땐 매일 술을 마셨어요. 시간을 때워야 했기 때문이죠. 그러던 중 하우징 퍼스트를 통해 46㎡ 면적,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구하게 됐어요. 위협을 받을까 두려워하지 않게 됐고, 술을 마실 필요 또한 사라졌죠."

집은 미래를 꿈꾸게 하는 역할도 했다. 핀란드에 이민을 왔다가 2년간 노숙 생활을 했다는 B씨는 "하우징 퍼스트를 통해 집을 구하고 생활이 안정되자 노숙할 땐 몰랐던 재능이 내게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공동주택에 사는 이들을 위해 요리를 전담하던 그는 나중에 요리 학교에도 입학했다. 사업을 하다 망해 호스텔을 전전했던 C씨도 집을 얻고 난 뒤에야 "무슨 일이든 다시 도전해 보자"는 마음을 먹게 됐다고 한다.


과대 평가?... "'해결할 수 있다'는 의지가 중요"

핀란드의 성공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있기는 하다. ①'핀란드가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이민자 유입이 적어서 노숙자 규모가 크지 않고, 따라서 노숙자 수를 줄이기도 수월했을 것'이라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카힐라는 "게으른 비판"이라고 일축했다. "시리아나 우크라이나에서 난민이 밀려왔을 때 우리는 잘 수용했어요. 무엇보다 하우징 퍼스트를 실시한 국가, 도시가 여럿인데 핀란드가 독보적 성과를 거둔 것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오랫동안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②주택 마련 등에 너무 많은 돈이 든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핀란드 정부는 "노숙자 문제를 방치했을 때 드는 직간접적 비용과 비교하면 오히려 비용 절감일 수 있다"고 판단한다. 노숙자를 위한 임시 숙소, 긴급 서비스, 노숙자 밀집 지역 치안 유지 등에 드는 비용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③'2027년까지 장기 노숙자 0명 달성'이라는 공언이 과하다는 반응도 나온다. 카힐라는 "물론 어렵겠지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어떤 노숙자에게 '집을 지원해 줄 테니 여기서 사세요'라고 말했을 때 '싫다'고 답할 수도 있죠. 사회에 대한 신뢰가 없으니까 거부감을 갖는 겁니다. 그러나 10년 이상 노숙자와 교류하며 느낀 것은 '집 밖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점입니다."

핀란드가 '확실한 성공'을 거둬서일까. EU 자문기구인 유럽경제사회위원회도 지난해 비슷한 정책을 제언했다. "주택은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다. 사회에 재통합되도록 하는 중추적 도구다. 이에 주거 우선 원칙 촉진을 제안한다. EU 회원국들이 2030년까지 노숙자 종식을 향한 약속을 이행하고 실질적인 진전을 이룰 것을 촉구한다."

베를린= 신은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