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7일 한국일보 ‘여론 속의 여론’ 기사에 따르면,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임신중단에 대한 인식 조사 결과 3명 중 1명이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를 헌법불합치로 판결한 사실을 모른다고 답했다 한다. (4월 27일 자 ‘여론 속의 여론 – 임신중단에 대한 인식조사) 기사 작성자인 송승연 한국리서치 책임연구원은 2019년 헌법재판소의 판결 이후 만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전혀 모른다는 것은 “법 개정을 위한 사회적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는 ‘정답’을 제시했다. 나는 이 ‘정답’에 덧붙여 낙태죄가 있었는지도 몰랐던 이들도 많았으리라 추측한다. “낙태가 불법이었어?” 20여 년 전, 여성들의 낙태 경험을 조사하느라 인터뷰를 했을 때 당시 중, 노년 여성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반문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낙태’(나는 ‘임신중단’이 맞는 용어라고 생각하지만 ‘낙태’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온 역사성을 고려해 맥락에 따라 두 용어를 혼용한다)는 오랫동안 불법이지만 허용되어 왔다. 아니 ‘강제’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이런 역설적인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형법은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했지만 모자보건법은 임신 24주 이내 낙태를 허용했기 때문이다.
1973년 신설된 모자보건법은 ‘가족계획’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산아제한정책의 일환이었다. 여성학자 배은경은 저서 '현대 한국의 인간 재생산 – 여성, 모성, 가족계획사업'(시간여행, 2012)에서 가족계획이 박정희 군사정권 단독의 결정이 아님을 밝힌 바 있는데 이에 따르면 냉전 시기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인구 체제가 제3세계 국가들에 강력하게 권고한 것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 서구 국가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있는 아시아 지역이 모두 공산화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아시아 인구가 더 많아지면 백인종의 설 자리가 없어질 수 있다는 인종차별적 공포심도 한몫했다. 산아제한정책을 받아들이는 국가에 대해서는 여러 원조를 약속했으니 북한과의 대립 속에서 외화벌이와 경제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가족계획’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포함되어 전 국가적 프로젝트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모자보건법은 가족계획의 성공적 수행을 위한 법적 도구였다. 임신이 되는 대로 출산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여성들 또한 이를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당시 산아제한의 여러 방식들이 임신과 낙태가 일어나는 여성의 몸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피임을 위해서는 난관수술 등 여성 몸에 대한 시술보다는 남성 몸에 대한 시술이나 콘돔 사용이 더 안전하고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이에 대한 남성들의 저항은 컸다. 많은 남성들이 정관수술을 하면 ‘정력’에 문제가 생긴다고 믿었고 콘돔은 ‘장갑 낀 손으로 코 파는’ 격이라며 거부했다. (요즘도 이런 남성들이 심심치 않게 있다. 한국 성교육은 ‘아기가 어떻게 태어나는가’가 아니라 ‘남성은 왜 콘돔을 거부하는가’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빠른 시간 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였던 당시 정권은 여성 몸의 안전과 건강을 고려한 제대로 된 성교육 대신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여성 몸에 대한 시술과 낙태를 강행했다.
리페스루프 시술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루프는 수정란이 착상되지 않도록 자궁 내에 삽입하는 기구인데 1960년대 미국에서 개발되었다. 그런데 당시 한국 정부는 이 기구가 상용화되기도 전에 이를 ‘보급’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업을 진행한 김택일 보건사회부 모자보건반장은 '인구정책 30년'(한국보건사회연구원, 1991)에서 1964년 2만 건 시술 계획을 세웠으나 당시 정희섭 보건사회부 장관이 30만 건을 달성하라고 하여 모양만 본떠 급하게 만든 리페스루프를 농촌 지역 여성들에게 시술한 일화를 회고한 바 있다. 그 어떤 안전성 검증도 거치지 않은 이물질이 1964년 한 해에만 30만 명의 여성들에게 시술된 것이다.
2014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자, 이제 댄스타임'(조세영 감독)에는 이즈음 정부의 가족계획 시책에 부응해 루프 시술이며 낙태를 했던 여성들이 등장해 경험을 증언한다. 수정란이 착상해 어느 정도 자랐다가 루프에 걸려 낙태를 해야 했던 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등 문제가 생긴 이, 무엇보다 임신이 안 된다고 했는데 임신을 하게 되어 아홉 번이고 열 번이고 낙태를 했던 이들도 드물지 않았다. 그래도 국가는 멈추지 않았다. 루프가 부작용이 있다고 하니 이후에는 먹는 피임약이며 난관수술을 여성에게만 강하게 ‘권했다’. 그 시대 여성들이 “낙태가 불법이었나?”라고 되묻는 데는 이러한 사정이 있다.
이런 사회에서 낙태문제에 대해 서구와 같이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이 대립하는 논의는 가능하지 않았다. 한국 여성들에게 낙태는 자신의 결정권에 속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 문제에서 한국 여성들이 ‘선택’한 것이 있다면 여아 성감별 낙태 정도가 아닐까. 이는 가족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출산해야 한다고 하고 국가는 출산하지 말라고 한 두 명령 사이에서 여성이 해야만 했던 ‘선택’이 기술을 추동한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사문화된 낙태죄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2000년대 말이었다. 서구에서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대립되는 것으로 논의된 ‘태아생명권’ 주장을 그대로 가져온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낙태 근절 운동을 선포하면서 낙태 시술을 한 병원 의사들을 ‘법대로’ 고발한 것이 발단이었다. 이제는 저출생이 문제가 되자 정치권도 이에 호응했다. 시민사회는 임신중단을 여성의 권리로 언어화해 맞섰다. 한국 사회에서도 임신중단이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 사이의 대립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논의 지형은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낙태죄를 “침해의 최소성과 법익균형성을 위반하여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림으로써 일단락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은 정말 대립하는 권리일까? 사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낙태는 남성은 물론이고 여성이라고 해서 다 알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그중 핵심은 여성과 태아가 다른 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임신한 여성은 임신하지 않았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먹을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을 먹지 않는다. 그녀의 자기결정은 태아의 생명에 결정적이다. 또한 태아가 세상에 나와 사람이 되는 것은 여성의 자기결정 없이 가능하지 않다. 어떤 임신한 여성이 태아를 낳지 않기로 결정하면 태아는 세상에 나올 도리가 없다. 이는 여성의 자기결정과 태아의 생명이 분리불가능함을 증명한다.
사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대립시켜 후자를 주장하는 논의는 진정 생명을 중시해서라기보다 여성과 태아 모두를 남성의 소유로 보는 발상에 기반한다. 여성이 자신의 몸에서 분리할 수 없는 태아에 대해,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여성에게는 허구적일 수밖에 없는 태아생명권을 강조하는 것은 여성의 임신 지속 결정에 중대한 영향력을 미치기 어렵다. 그보다는 여성이 출산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도록 여러 사회적 조건을 개선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판결 이후 출발한 21대 국회는 임신중단 관련 법을 제정해야 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저출생에 대한 온갖 번지르르한 근심을 앞세워 제대로 된 논의의 장조차 마련하지 않은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그러는 사이 여성들은 오늘도 안전과 건강을 담보하기 어려운 임신중단을 결정하고 있다. 법이 공백인 상황에서 의료계가 겪는 혼란도 적지 않다. 부디 22대 국회는 제대로 된 논의의 장을 마련해 임신중단 관련 법을 제·개정하는 역사적 소명을 다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