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19일 오전 9시쯤 속보가 날아들었다. 한반도에 들이닥친 기습폭우 피해 지역에서 실종된 사람들을 수색하던 해병대 1사단 포병여단 포7대대 본부중대 병사가 경북 예천군 내성천 보문교 일대에서 수색하다가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 실종됐다. 실종된 해병은 2022년 3월 입대한 채모 상병(당시 일병). 그를 찾기 위해 해병대와 소방당국이 나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날 밤 11시 7분쯤 보문교 하류 400m 지점에서 채 상병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군이 국민 생명을 지키는 작전을 한 것을 나무랄 순 없지만, 이때 해병대원 투입 작전은 지나치게 '무리한 수색'이었음이 서서히 밝혀졌다. 채 상병이 동료 해병대원 5명과 함께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채, 손을 잡고 일렬로 줄지어 한 걸음씩 나아가며 실종자를 수색하다 급류에 휩쓸린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실제 채 상병 말고도 장병 4명이 수색 도중 강물에 떠내려갈 뻔했다가 구조되기도 했다.
누가, 왜 이렇게 무리한 수색작전을 지시했던 걸까. 구명조끼를 입었거나, 좀 더 신중한 접근을 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사고는 아니었을까. 과연 어느 지휘라인까지 책임을 물려야 하는가.
이를 파악하기 위해 박정훈 대령이 이끄는 해병대 수사단은 채 상병 사망 이튿날 곧바로 조사에 착수했다. △익사 사고 발생 경위 △안전장구(로프·구명조끼 등) 미휴대 경위 △강물 입수 경위 △제대별 지휘관 및 안전통제 간부의 업무상 과실 여부를 밝히는데 집중했다.
수사단은 당시 현장 간부들과 생존 해병 등을 8일 동안 조사한 끝에 채 상병 사망은 인재(人災)라고 결론 내렸다. ①지휘관(중·대대장)의 작전준비가 미흡한 탓에 임무수행에 필요한 안전장구를 휴대하지 못했고 ②안전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색작전이 실시됐으며 ③상급자의 지적으로 현장의 지휘관이 지휘부담을 느껴 허리 아래 수중 수색을 지시한 것이 채 상병 사망 원인으로 지목됐다.
책임자로 간부 8명이 거론됐다. △임성근 해병대 1사단장(소장) △박모 7여단장(대령진) △최모 포병11대대장(중령) △이모 포병7대대장(중령) △장모 본부중대장(중위) △노모 중위 △김모 상사 △박모 중사가 그 대상이었다. 박 대령은 지난해 7월 28~30일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과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에게 "8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경찰에 이첩하겠다"고 보고하고 결재도 받았다.
이때까지 상황으로만 보면 군과 국방부 차원에서 할 일은 다했던 셈이다. 남은 건 7월 31일 국회에 채 상병 사망 경위를 보고한 뒤, 해병대 수사단이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나서 경찰에 사건을 이첩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뭐가 꼬이기 시작한다. 바로 7월 31일이다. 그날 일정은 갑자기 취소됐다. 이 전 장관은 이날 오전 11시 54분 대통령실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누구와 통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전 장관은 통화 직후 김계환 사령관에게 전화했다. 해병대 수사단의 사건 기록을 경찰에 이첩하는 걸 보류하고 언론브리핑도 취소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국회 보고도 취소됐다.
이 전 장관은 이어 오후 1시 30분 채 상병 사건 관련 현안 토의를 열었다. 참석자는 박진희 전 국방부장관 군사보좌관,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 정종범 전 해병대 부사령관이었다. 참석자들의 군 검찰 진술 등을 종합하면 이 전 장관은 이 자리에서 정 전 부사령관에게 '경찰 이첩은 법무관리관과 협의해 나의 출장 복귀 이후에 하라'고 지시했다. 이 전 장관은 토의 직후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나 8월 3일 귀국했고, 이첩 보류 지시는 김 사령관을 통해 박 대령에게 전달됐다.
박 대령은 이 지시를 단순히 '이첩을 멈추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5회에 걸친 유 관리관과의 통화, 김 사령관과의 독대 이후 '사건 인계서에서 죄명과 혐의자를 빼라'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이튿날인 8월 1일 김 사령관과 이윤세 해병대 공보정훈실장 등이 배석한 해병대 간부 회의에서 "수사 과정에서 상급제대 의견에 따라 사건의 혐의자를 변경하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에 해당한다"며 "언론 등에 노출되면 BH(대통령실)와 국방부는 정치적·법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박 대령은 결국 이 전 장관이 귀국하기 전날인 8월 2일 오전 11시쯤 사건기록을 경찰에 이첩했다. "이첩을 중단하라"는 김 사령관 지시도 듣지 않았다. 김 사령관은 이 전 장관과 함께 해외에 있던 박 전 군사보좌관에게 상황을 알렸고, 결국 이 전 장관은 박 대령에 대한 보직해임과 수사를 지시했다. 곧이어 수사에 나선 국방부 검찰단은 박 대령에게 집단항명의 수괴(首魁)라는 '무시무시한' 혐의를 적용했다. 수사서류를 이첩한 해병대 1광수대장 등을 모두 항명한 것으로 보고 집단항명죄를 선택한 뒤, 그 우두머리로 박 대령을 지목한 셈이다. 군형법상 집단항명 수괴는 △적전인 경우 사형(다른 법정형이 없음) △전시·사변 또는 계엄지역인 경우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징역 △그 밖의 경우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해진다.
결국 국방부 검찰단은 이날 저녁 직접 경북경찰청에서 사건 기록을 회수했다. 순식간에 항명범으로 몰린 박 대령은 국방부 검찰단의 전방위 수사를 받았고, 해병대 수사단 조사기록도 국방부 조사본부가 맡아 전면 재검토했다.
조사본부는 해병대 수사단과 다른 결론을 내렸다. 조사본부는 8월 14일 재검토 중간 보고에서는 노 중위 등 초급 간부 2명을 제외한 임 전 사단장 등 6명의 혐의가 인정된다고 판단했으나, 결국 8월 20일 국방부 법무관리관실과 국방부 검찰단 의견을 받아들여 최모 중령과 이모 중령 혐의만 인정된다고 결론 내렸다. 8월 24일에는 이런 결론을 담은 보고서를 경북경찰청에 재이첩했다.
국방부 검찰단은 8월 30일 박 대령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군법원에서 기각됐다. 그러자 10월 6일 박 대령을 항명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박 대령은 이첩을 보류하고, 이첩을 중단하라는 정당한 명령을 받았는데도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박 대령이 "이 전 장관이 '사단장을 형사처벌 대상에서 빼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사유로 상관명예훼손 혐의도 적용했다. 이후 박 대령은 지금까지 중앙군사법원에서 군사재판을 받고 있다.
투스타(소장·사단장) 입건 의견을 밝힌 대령(수사 책임자)을 '항명의 수괴'로 몰았다가, 무리하다 싶으니 다시 '항명범'으로 규정한 군의 조치는 과연 정당한 일이었을까. 군은 어떤 외부의 압력 없이, 오롯이 자체적 판단으로만 박정훈 대령을 군사재판에 세우자고 판단한 것일까.
여기서 대통령실의 외압 의혹이 불거진다. 국방장관 결정을 하루 아침에 뒤집을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 명이나 있을지를, 모두들 떠올리게 됐다. 결국 한 해병대원의 안타까운 순직은 수사책임자의 항명죄 누명 논란을 거쳐, 권력 핵심부가 개입됐을 수 있는 '수사외압 의혹'으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채 상병 수사외압 의혹의 '발단' 부분이다. 그럼 대통령실과 국방부는 어떤 식으로 채 상병 사망 수사 과정에 개입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는 걸까. 수사외압 의혹의 전개 과정으로 넘어가자.
※이 기사는 '채상병 사건 트릴로지 ②: 병사의 순직이 용산의 위기로 확대된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6월 22일 오후 4시에 출고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