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기로 유명한 일본 관객도 일으켜…30대 조성진의 라벨·리스트 연주

입력
2024.06.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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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영의 클래식 노트]

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2015년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9년간 놀랍게 성장했다. 21세에 도이치그라모폰 음반 레이블과 전속 계약, 미국 뉴욕 카네기홀 데뷔,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협연, 모차르트 미발표곡 세계 첫 연주 등의 기록을 썼다.

올해는 베를린 필하모닉 2024~2025년 시즌 상주 음악가로 활동하며 아시아 국적 음악가론 처음으로 두 번의 협연과 앙상블, 리사이틀 무대에 오른다. 음악가의 정체성과 위치를 찾아가는 30대를 최고의 오케스트라, 극장, 관객과 시작하는 것이다. 이 활동을 앞두고 조성진이 최근 일본 6개 도시와 광주, 강원 강릉시의 객석을 뜨겁게 달군 작품은 라벨과 리스트였다. 두 작곡가는 피아니스트들이 숙제처럼 도전하는 소나타 형식의 방대한 작품 목록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리스트의 소나타 b단조(S.178)는 엄청난 걸작이지만, 기성 형식에서 벗어나 독창적 언어로 명확한 세계를 구축한 작곡가들이기에 조성진의 선택이 흥미로웠다.

리스트는 오스트리아 빈 최고의 피아노 스승인 체르니가 인정한 세기의 피아노 천재였고, 당대 베토벤 작품의 최고 해석자였다. 베토벤이 그의 연주에 탄복해 리스트 이마에 축복의 입맞춤을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리스트는 피아노가 크게 환영받았던 1830년대 프랑스 파리에서 베토벤과 자신의 피아노곡은 물론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 베르디의 '리골레토' 등 관현악과 오페라를 피아노로 편곡해 연주하며 널리 알렸다. 교향시의 창시자로서 19세기 관현악곡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기도 했다. 리스트는 피아노라는 악기의 한계를 뛰어넘은 피아노 천재였기에 당대 쇼팽, 알캉, 탈베르크 등 비르투오소 연주자들과의 대결 구도에서 압승한 게 아닐까.

라벨은 라모, 베를리오즈를 잇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레이션(관현악 편곡) 달인이었다. 첫 피아노곡도 편곡한 작품이었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슈만의 '사육제',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등 다른 작곡가의 작품은 물론 본인의 피아노곡인 '쿠프랭의 무덤'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 '라 발스' '마 메르 루아' 등을 관현악곡으로 재편성해 무대에 올렸다.

기교와 서사 모두 어려운 라벨과 리스트

그 때문일까. 리스트와 라벨의 피아노 작품 속 음표와 화성의 구성은 오케스트라 편성만큼 풍성하다. 동시에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기교적으로 어렵고, 화려하며 입체적 이야기를 담았다. 조성진이 선택한 라벨 작품은 '소나티네' '그로테스크한 세레나데' '고풍스런 미뉴에트' '우아하고 감상적인 왈츠' '밤의 가스파르' '쿠프랭의 무덤'이고 그리고 리스트는 말년의 대서사를 담은 '순례의 해 제2년 이탈리아'의 7개 전곡이었다. 철학적이면서도 시각적이고, 시와 신화, 서사와 긴 호흡을 담은 무거운 작품들이다.

기능적으로 잘 치기도 어렵지만 단테의 '신곡' 중 연옥과 천국, 구원을 향한 희망까지 그려 낸 '단테를 읽고, 소나타풍의 환상곡' 등은 그 깊이와 상상력에 감히 도전하기도 어려운 곡이다. 리스트는 자신의 연주 실력을 기준으로 곡을 썼기 때문에 대부분의 곡이 '초월기교적'으로 어렵다. 라벨은 당시 난곡의 대명사였던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보다 더 어려운 곡을 쓰겠다며 라벨 특유의 묘사적 작법으로 천재적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라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 있다.

놀라운 것은 자유롭고 상상력 넘치는 작곡가들의 작품을 소화해 낸 조성진의 연주였다. 지난 12일 일본 도쿄 선토리홀 공연에서 소극적인 일본 관객들이 일제히 기립하는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20대의 조성진은 모범적이고,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완벽함을 추구하는 '치밀한' 사람이었다. 라벨과 리스트 연주에선 셔츠 단추를 몇 개 푼 듯 '치명적' 음악을 보여줄 때마다 놀라웠다. 세계 무대를 누빈 지난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연주자의 캐릭터를 변화시킨 것일까. 베를린 관객들은 그들의 상주 음악가를 어떻게 맞이할까. 또 다른 10년 후의 조성진은 독보적 존재감의 음악가가돼 있지 않을까. 30대를 시작하는 조성진의 음악을 진심으로 기대하게 됐다.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