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릿 표절을 이야기하니까 한편에선 뉴진스도 표절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룹 아일릿의 소속사 빌리프랩의 김태호 대표는 10일 유튜브 임시 채널에 ‘표절 주장에 대한 빌리프랩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28분짜리 영상을 올려 어도어 민희진 대표가 제기한 표절 의혹을 반박하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 4월 25일 민희진 어도어 대표가 기자회견에서 모회사 하이브 산하의 계열사인 빌리프랩이 아일릿을 제작하며 뉴진스의 제작 포뮬러(공식)를 따라했다고 주장한 지 한달이 훨씬 지난 시점에 공개된 영상이었다.
민희진 대표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제작된 이 영상은 가뜩이나 사이가 좋지 않은 하이브 소속 걸그룹 팬덤들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한편 어설픈 논리와 부적절한 발언으로 역풍을 맞았다. 업계 관계자들과 평단은 입을 모아 ‘헛발질’ ‘자폭’ ‘최악의 한 수’라는 말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제대로 된 해명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언급으로 논란과 갈등만 더욱 키웠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자사 소속 그룹을 지키기 위해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등 다른 K팝 그룹들을 끌어들인 것은 무리수라는 지적도 나왔다. 빌리프랩이나 어도어가 아닌 제3자가 했어도 좋은 평가를 듣기 어려운 이야기를 빌리프랩의 대표와 부대표가 나서서 했다는 사실에 관계자들은 경악했다. 14일 현재 이 영상에 '좋아요'를 누른 유튜브 사용자는 1만여 명에 지나지 않는 반면, '싫어요'를 누른 사용자는 14만 명에 이른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대중이 납득할 만큼 명확한 해명은 없고 ‘우리는 억울하다’는 감정 호소로 ’아일릿뿐만 아니라 뉴진스도 표절 아니냐’는 식의 주장을 하니 공감을 얻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빌리프랩의 해명 영상은 하이브와 민 대표 간의 갈등이 촉발한 4세대 걸그룹 팬덤 간의 갈등을 더욱 부추겼다는 점에서 비판 받고 있다. 지난 3월 데뷔한 아일릿의 음악적 스타일, 안무, 패션 등이 일부분 뉴진스와 비슷하다는 지적은 민 대표가 기자회견에서 언급하기 전부터 팬들 사이에서 나왔다. 업계 전문가들과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아일릿과 뉴진스의 유사성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다. 유명 K팝 기획사 관계자는 “아일릿 데뷔 당시 이미 각종 커뮤니티 게시판에 뉴진스와 유사성을 언급한 글이 많이 올라왔고, 업계 내에선 왜 하이브가 굳이 한지붕 아래에 있는 뉴진스와 유사한 콘셉트를 가져와 아일릿을 제작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민 대표의 발언은 팬덤 간의 갈등과 악플러들을 자극했고, 무분별한 표절 의혹과 근거 없는 비방이 쏟아졌다. 비방전이 심화하자 각 회사들은 속속 법적대응이라는 칼을 빼 들며 악플러들과 전쟁을 선포했다.
하이브 산하 레이블 간의 갈등은 팬들의 대리전 양상으로 악화하고 있다. 여기에 악플러들과 자극적 소재만 좇아다니는 '사이버 렉카'들까지 가세하며 상황은 더욱 혼탁해졌다. 그러다 보니 하이브 자회사 3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악플러들과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통상 경쟁사 간에 벌어지는 일이 한 회사 안에서 벌어진다는 점에서 하이브의 멀티레이블 시스템 운영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어도어는 지난 5일 공식 입장문에서 "커뮤니티 사이트들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여 뉴진스 멤버들과 관련한 악성 댓글, 역바이럴, 악의적 비방, 모욕,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등의 행위에 대해 민·형사상의 소송 등 법적 대응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르세라핌 소속사 쏘스뮤직도 7일 팬 커뮤니티 위버스에 "악성 게시글 또는 댓글을 작성한 행위가 유죄로 인정돼 다수의 피고인들이 최대 200만 원의 벌금형 등으로 형사처벌을 받았다"고 전했다. 빌리프랩 또한 10일 아일릿에 대한 명예훼손, 모욕, 성희롱, 허위사실, 악의적 비방 등 악성 게시물 작성자 수백 명을 대상으로 경찰에 고소장을 접수했다고 밝혔다.
아일릿, 르세라핌, 뉴진스에 대한 비방과 허위사실 중 일부는 표절 의혹과 관련한 것으로 알려진다. 특정 곡의 유사성뿐만 아니라 뮤직비디오 등 영상, 의상이나 스타일 등 콘셉트가 비슷하다는 글을 토대로 각 그룹을 깎아내리는 비방과 허위사실 유포가 이어지고 있다. 빌리프랩의 해명 영상은 여기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빌리프랩은 심지어 뉴진스가 데뷔 당시 입었던 TV 음악 방송에서 입었던 의상이 블랙핑크의 과거 의상과 유사하다고 주장하는 무리수로 역풍을 맞았다. 김도헌 대중문화평론가는 “아일릿만의 독창적이고 뛰어난 콘텐츠를 내놓는다면 대중은 아일릿은 ‘뉴진스 카피’가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될 텐데 굳이 이 문제를 왜 다시 꺼내려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형 K팝 기획사들이 자본으로 시장을 장악한 데다 최근 들어 뉴진스와 아일릿, 르세라핌을 둘러싼 이슈가 대중의 이목을 빨아들이면서 신인 걸그룹들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영파씨, 키스오브라이프 등 실력과 개성을 두루 갖춘 신인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아직 두드러진 성과를 내진 못하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컴백홈’을 녹여 만든 ‘XXL’로 강한 인상을 남긴 영파씨는 걸그룹 가운데서 보기 드물게 올드스쿨 힙합으로 팬들을 사로잡았고, 키스오브라이프는 탄탄한 가창력에 1990~2000년대 R&B로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에스파, 뉴진스, 아이브, 르세라핌 등 4세대 선두주자들은 물론 올해 데뷔한 아일릿, 베이비몬스터 등에도 크게 밀리고 있다. 이들은 올해 멜론 주간차트 40위 안에 오른 적이 없다.
4세대 걸그룹 간의 격차가 커지자 벌써부터 5세대를 자처하는 그룹도 등장했다. 기존 4세대 걸그룹들과 차별화를 시도하겠다는 의도다. 키스오브라이프는 지난달 MBC 음악 예능 프로그램 ‘송스틸러’에 출연해 스스로를 “5세대 4인조 걸그룹”이라고 소개했다. 김도헌 평론가는 “SM, JYP, YG, 하이브 등이 K팝의 체급을 너무 높여버려 데뷔 때부터 성공을 보장받은 팀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면서 “대형 기획사 소속 신인 그룹과 중소 기획사 신인 그룹은 인지도 면에서 큰 차이가 난 상태로 데뷔할 수밖에 없어 ‘5세대’ 같은 실체 없는 마케팅을 하는 듯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