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벨리 변주곡, 가죽 자투리가 낳은 걸작

입력
2024.06.15 04:30
19면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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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이 '구둣방에 굴러다니는 가죽 쪼가리' 같다며 분개한 선율이 있었다. 하지만 그 선율에 33개의 변주를 붙여 걸출한 걸작을 남긴다. 피아니스트 알프레트 브렌델은 '모든 피아노 레퍼토리 중 가장 위대한 걸작'이라 칭송했고, 지휘자 한스 폰 뷜로는 '베토벤 예술의 축소판'이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이 곡은 무대에서 자주 연주되지 않는다. 거대한 규모에 미세한 세부, 지적 사색에 난데없는 유머 등 실타래가 얽혀 제대로 이해하려면 연주자뿐만 아니라 청중에게도 몰입과 헌신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1819년, 오스트리아의 출판업자이자 작곡가 안톤 디아벨리는 당시 빈 음악계에서 활약하던 작곡가 50여 명을 엄선해 편지를 보낸다. 자신이 작곡한 왈츠 주제에 한 곡씩 변주곡을 보내 달라는 요청이었다. 이렇게 묶은 변주곡을 악보로 출판해 나폴레옹 전쟁이 낳은 미망인과 고아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려고 했다. 변주곡 제목도 '조국 예술가 동맹'이라고 거창하게 붙였다. 이때 작곡가 위촉 명단에는 베토벤과 체르니, 슈베르트, 아직 11세였던 리스트 등 당대 최고 작곡가를 망라하고 있었다. 일종의 음악적 브레인스토밍이었던 셈이다.

베토벤은 애초 이 제안에 응하지 않았다. 디아벨리의 주제는 그에게 구두 수선공의 가죽 자투리처럼 하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성적 뼈대는 마음에 들었다. 외형상 단조로운 주제가 구조적 발전에 무궁무진한 잠재력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몸체가 간결할수록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 천변만화의 가능성이 존재했다. 그러므로 다른 작곡가들이 디아벨리에게 하나짜리 단출한 변주곡을 제출했을 때, 베토벤은 아예 33개 변주곡으로 구성된 거대 작품을 창조했다.

디아벨리는 이 곡을 별도로 독립시켜 출판하면서 '변주곡 장르에서 바흐의 걸작 옆에 나란히 자리 잡을' 작품이라 홍보했다. 그런데 베토벤은 악보 표지 제목을 '변주곡(Variationen)'이 아니라 'Veränderungen(변용)'이라 붙이길 고집스레 원했다. 통상적 변주곡에선 아무리 화려한 장식 음형이 가세한다 해도 주제 윤곽을 가늠할 수 있지만, 베토벤은 주제에서 본질만 취한 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샅샅이 해체시켰다. 그러므로 이 곡은 베토벤 1인의 창작이지만 마치 작곡가 33명의 발명품을 합체한 듯 변주마다 기발한 독창성이 돋보인다. 가죽 자투리에서 탄생한 걸작은 그렇게 후세에 전해졌다. 웬만한 연주력으로는 정복하기 어려운 위용을 20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뽐내고 있다.



조은아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