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은 독' 카이스트에 515억 기부한 정문술 전 회장 별세... 향년 86세

입력
2024.06.1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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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억, 215억... 벤처 1세대의 '통 큰 기부'
혈연 아닌 전문경영인에 회사 넘겨 화제
"돈 줬으면 잊어버려야... 생색내기 싫어"

"부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게 돼 기쁘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에 515억 원을 기부하며 바이오, 뇌공학 발전의 '키다리 아저씨' 역할을 톡톡히 해왔던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카이스트 전 이사장)이 13일 향년 86세로 별세했다.

정문술 전 회장은 누구

1938년 전북 임실군에서 태어나 익산 남성고와 원광대 동양철학과를 나온 정 전 회장은 군 복무 중 5·16을 맞았고, 혁명군 인사·총무 담당 실무를 담당하다 1962년부터 중앙정보부에서 일했다. 1980년 5월 중정 기조실 기획조정과장이었던 정 전 회장은 군사 쿠데타 이후 해직됐고, 창업의 길로 뛰어들었다. 녹록지는 않았다. 퇴직금 사기를 당하고, 사업에 실패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정 전 회장은 저서 '왜 벌써 절망합니까'(1998)에서 당시 사채에 쫓겨 가족 동반 자살까지 꾀했다고 밝혔다.

상황은 1983년 반도체 장비 제조업체인 미래산업을 창업하면서 바뀌었다. 일본 퇴역 엔지니어를 영입, 반도체 검사장비를 국산화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물론 이때도 무인 검사장비 개발에 도전했다가 돈을 몽땅 날리는 등 고비가 있었지만, 국산 반도체 붐에 힘입어 고속 성장해 1999년 11월에는 국내 최초로 회사를 미국 나스닥에 상장시켰다.

"부를 대물림하지 않겠다"

'벤처 1세대'로 불린 정 전 회장은 2001년 아무 혈연관계가 없는 전문경영인에게 회사 경영권을 내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파격 행보는 계속됐다. "생명공학과 정보기술을 융합한 학문 발전에 써달라"며 카이스트에 선뜻 300억 원을 기부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시 "덕행 소식에 감명을 받았다. 열 명의 빌 게이츠에 못지않은 일을 해내셨다"며 친서를 보내기도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2014년에는 "뇌 인지과학 분야 인력을 양성해달라"며 215억 원을 추가로 기부했다. 카이스트에서 정 전 회장의 515억 원은 정문술·양분순(아내) 부부 이름을 붙인 건물 건립과 바이오 및 뇌공학과, 문술미래전략대학원 발전의 토대가 됐다.

정 전 회장은 남다른 기부 신념으로도 이목을 끌었다. 아내 양씨와 사이에 2남3녀를 둔 정 전 회장은 평소 '유산은 독'이라고 말해왔다고 알려졌다. 실제 그는 2014년 기부금 약정식에서 "많은 재산은 없지만 평소 부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왔다. 무엇보다 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게 돼 행운이라고 생각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두 차례 있었던 건물 준공식에는 '생색내기 싫다'며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기부의 가교였던 이광형 카이스트 총장(당시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이 취임하던 2021년 양분순 빌딩을 준공 4년 만에 찾았는데, 그때도 정 전 회장은 "돈을 줬으면 잊어버려야 한다. 그간 기부한 사실을 잊으려 한 번도 오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 전 회장은 국민은행 이사회 의장, 2009~13년 카이스트 이사장을 지냈다. 2014년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과학기술훈장 창조장을 받았고, 같은 해에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의 '아시아·태평양 자선가 48인'에 선정됐다. 빈소는 건국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15일 오전 9시다.

오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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