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천안시 원성동 하수관로 정비공사와 관련, 담당 공무원이 공사를 준 시공업체로부터 형사 고소를 당한, 희대의 사건 배경엔 기초 단체의 관급 공사에 만연한 ‘강압적 청탁’ 관행이 있다. 청탁금지법이 엄존해도 일선 행정 현장에선 이 문화가 사라지지 않고, 한계에 이르러 ‘터질 게 터졌다’는 것이다. 관급공사를 수주한 업체(‘을’)는 발주기관인 천안시 공무원(‘갑’)을 왜 형사 고소까지 했을까. 이른바 ‘개가 주인을 문 사건’의 전말을 들여다봤다.
24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사건의 발단은 2023년 1월 10일 천안시 맑은물사업본부 소속의 Y주무관의 ‘청탁’에서 비롯됐다. 앞서 2022년 12월 20일 충남 논산에 본사를 둔 H건설이 110억 원 규모의 천안시 하수관로 교체 공사를 수주하자, 관계자를 불러 천안 소재 J건설 부사장의 명함을 건넨 일이다.
H건설 관계자는 “Y주무관은 그러면서 그 건설업체를 하도급사로 선정해줄 것을 요구했다”며 “J건설로부터 견적을 받았지만 계약 금액이 너무 높고, 일괄하도급을 요구해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수주한 공사 전체 또는 대부분의 공사를 한 하청업체에 맡기는, 일괄하도급은 건설산업진흥법에서 엄격하게 금지하는 범법 행위다. H건설에 따르면 J건설이 제시한 하도급 공사 금액은 105억 원으로 하도급가율은 95%에 달했다. 이는 하도급적격심사 때 82% 이상일 경우 만점을 주는 정부 발주 공사에 비하면 높다. 계약업계 관계자는 “사실상 ‘수주한 공사를 다 넘겨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후 H건설에는 전화가 수시로 왔다. 발신자는 Y주무관이 있는 사무실의 다른 직원. H건설 관계자는 “Y주무관의 지시를 받은 다른 직원이 ‘J건설 하도급 선정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수십 차례 전화를 걸었다”며 “어떤 날엔 하루에 여섯 번이나 받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Y주무관은 한국일보 통화에서 “H건설에 내가 J건설 명함을 준 것도, 하도급 선정을 확인하는 전화를 시킨 것도 사실”이라면서도 “그것은 ‘지역건설산업 활성화 조례’에 따라 가급적 천안시의 장비와 인력을 쓰도록 지역 건설사를 추천한 것일 뿐, 하도급 계약 강요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건설산업진흥법에 따르면 이는 불법이고, 관행으로 용인되는 수준에서 벗어났다는 게 조달청 등 관계 기관의 설명이다. 관급 공사 발주, 업체 선정 과정에 대해 잘 아는 한 관계자는 “그(지역건설업체에 하청을 유도하는) 경우에도 △공고 때 △공개적으로 △권장사항으로 밝혀야 한다”며 “지역 경제 활성화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공사 업체가 선정된 뒤 특정 업체를 콕 찍어 언급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자신이 추천한 업체가 하청업체로 참여하지 못하자, Y주무관의 보복이 시작됐다는 게 H건설의 주장이다. 통상 ‘현장소장’이 참석하는 관련 회의에, Y주무관이 H사 대표이사의 참석을 줄기차게 요구한 게 그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H건설 대표는 2월 21일 Y주무관 주재 회의에 참석했다. 그 자리서 Y주무관을 처음 만난 H건설 대표는 “내가 명함을 줬는데, 보는 앞에서 그 명함을 책상 위에 놓더니 구슬치기하듯 손가락으로 튕겨 바닥으로 버렸다”며 “Y주무관이 자신이 청탁한 업체를 하청업체로 쓰지 않은 데 대한 앙갚음이 아니고 뭐겠냐”고 말했다. 이에 대해 Y주무관은 “설 대표의 명함을 내가 손가락으로 튕겨 버렸다는 이야기는 내 기억에 전혀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이 일이 있은 뒤로 원성동 하수관로 정비공사는 멈추다시피 했다. 공사 내막을 잘 아는 건설업계 관계자는 “공사를 수주받은 업체가 담당 공무원의 뜻을 거스른 게 사건 근본 배경”이라며 “사건을 받은 경찰은 물론 국무조정실 등 정부에서도 이 사건을 신속하게 수사해서 공직 기강을 바로 잡고, 불법 청탁 관행을 뿌리 뽑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H건설은 이달 초 천안시 맑은물사업본본부장과 과장, 팀장 등 4명을 강요에 의한 갑질, 보복조치, 직권남용, 건설기본산업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