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희귀 중증질환자들은 이미 의학적으로 사망선고를 받아 시한부로 사는 인생이다. 의사 집단의 조직폭력배 같은 행동을 보고, 죽을 때 죽더라도 학문과 도덕과 상식이 무너진 이 사회에서 의사 집단에 의지하는 것을 포기하겠다.” (김태현 한국루게릭연맹회 회장)
서울대병원을 필두로 전면 휴진에 나선 주요 대학병원 교수들을 향한 환자들의 분노가 들끓고 있다. 환자들은 “휴진 철회”를 요구하며 정부에 “의사 집단행동을 엄벌하라”고 촉구했다. 추후 의사계에 대한 고소 고발도 검토하겠다고 했다.
한국다발골수종환우회, 한국폐암환우회 등 6개 단체가 속한 한국중증질환연합회는 1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의사들은 제자들을 생각한다면서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 환자들의 하소연은 매몰차게 거절하고 있다”며 “서울대 의대 교수들은 의료현장으로 돌아오라”고 질타했다. 서울대 의대·서울대병원 교수 비상대책위원회는 전공의 행정처분 완전 무효화를 주장하며 17일부터 무기한 휴진을 선언한 상태다.
환자단체는 서울대병원 교수들이 휴진을 결정한 이후 대한의사협회 전 회원 휴진(18일)이 급물살을 탔고 “환자 피해를 우려해 휴진하지 않겠다”던 다른 5대 상급종합병원(빅5 병원)과 주요 대학병원들로 휴진이 확산됐다고 지적했다. 식도암 4기 환자인 김성주 한국중증질환연합회 회장은 “윤리와 도덕과 상식에 따라 모범을 보여야 할 서울대 의대 교수들이 국민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내팽개쳤다”며 “밥그릇 챙기기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비판했다.
28년째 투병 중인 김태현 한국루게릭연맹회 회장은 대독자를 통해 “국민의 0.001%도 안 되는 소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의사들은 국민을 저버리고 이 사회를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며 “정부는 어떠한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의료개혁을 성공시키고 법과 원칙에 입각해 불법행동을 엄벌하라”고 주장했다. 변인영 한국췌장암환우회 회장도 “교수들은 4기 환자들을 호스피스로 내몰고, 긴급한 시술을 2차 병원으로 미루고, 항암을 연기하고, 수술을 미뤘다”며 “환자 목숨이 헌신짝처럼 버려질 수 있는 것인지 몰랐다”고 성토했다.
중증질환연합회는 △전공의 즉각 복귀 △필수·공공의료 및 지역의사제 실행 방안 마련 △교수 사직서 수리 △의사 집단행동 제재 법률 제·개정 등을 의료계, 정부, 정치권에 각각 요구했다. 김 회장은 “한 환자가 의사들에 대한 고소 고발을 추진하겠다며 도움을 요청해 왔다”며 “적극 검토해 볼 것”이라고 했다. 이어 “혹시라도 치료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우려해 얼굴과 이름은 물론 병명조차 밝히기 어려운 환자들이 고민 끝에 이 자리에 섰다”며 “기자회견은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기자회견을 지켜본 서울대병원 환자와 보호자들도 표정이 어두웠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남편을 면회하고 나오던 한 보호자는 “교수들이 다 나가면 환자들은 어떡하나. 대체 이 난리가 언제 끝나나. 속이 썩어 문드러진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날 서울대병원 본관과 어린이병원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북적거렸다. 그러나 17일부터 이 많은 환자는 갈 곳을 잃는다.
의료공백 장기화로 병동 통폐합, 무급휴가, 업무 과부하 등에 내몰린 병원 노동자 5,000여 명도 이날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의사 집단행동 중단을 촉구했다. 최희선 전국보건의료노조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은 “100일 넘게 지속된 의료공백으로 환자들이 치료 적기를 놓쳐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의사들이 또 명분 없는 집단휴진을 하려 한다”며 “집단행동으로 임금체불이나 구조조정 등 피해가 발생하면 단호히 투쟁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울러 “진료지원(PA) 간호사가 2만 명에 육박하는데 의사들만 의사가 부족하지 않다고 주장한다”며 “정부는 조속한 진료 정상화를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