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10명 중 4명이 외국인인 싱가포르에서 ‘외국인 노동자 규제’가 총선 앞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싱가포르 야당은 급격히 늘어나는 해외 인력 탓에 일자리 경쟁이 심화하고 국가 정체성마저 흔들리고 있다며 수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내국인 역차별’ 등 불만이 커지면서 싱가포르 성장 경쟁력으로 꼽혀온 ‘개방적 이민 정책’을 둘러싼 집권당의 고민은 더욱 커지는 분위기다.
12일 스트레이츠타임스와 인디펜던트싱가포르 등에 따르면, 야당 민주당은 최근 총선 캠페인 설명회를 열고 ‘외국인 노동자 유입 축소’를 총선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다. 싱가포르 총선은 내년 11월이지만, 지난달 권력을 이양받은 로런스 웡 총리가 조기 총선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이르면 올해 선거가 치러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날 민주당은 정부의 과도한 외국인 노동력 의존이 노동 시장과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국가 정체성을 악화시킨다고 꼬집었다. 치순주안 민주당 사무총장은 “해외 노동자 유입으로 싱가포르가 성장했지만, 그만큼 국가 정체성도 위협받고 있다”며 “기업들이 실질적 (기술) 향상을 추구하기보다 값싼 저임금 노동력에만 의지하면서 노동 생산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문직 외국 인력을 두고는 “부를 대물림하고 있다”고 일갈했다. 부유한 외국 노동자들이 토지 등을 구입해 상속세 없이 자녀에게 물려주면서 소득불평등을 키우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치 사무총장은 “우리의 주제는 외국인 혐오가 아닌 국익 추구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조만간 실무위원회를 구성해 해외 노동력 의존도를 낮출 수 있는 실질적 방안을 제시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인구가 적은 싱가포르는 1980년대부터 토목·건설, 가사노동 등 단순 노동력이 필요한 일에 저개발 국가에서 수입한 외국인 노동자를 써 왔다. 2000년대 들어 저출생·고령화 문제까지 겹치면서 인력 수요는 더욱 높아졌다. 저임금 노동력뿐 아니라 전문성을 갖춘 해외 우수 인재도 몰려들었다. 싱가포르 인구 592만 명(지난해 6월 기준) 가운데 30%(177만 명)가 외국인 근로자와 그 가족이며, 영주권자(54만 명)까지 포함하면 약 40%가 외국인이다.
그러나 외국 자본과 노동자가 몰리면서 부작용도 뒤따랐다. 주거비를 포함한 물가가 가파르게 치솟았고 일자리를 둘러싼 내국인과 외국인 사이 경쟁도 치열해졌다. 제한된 공공 인프라를 둘러싼 갈등도 커졌다. 카스투리 프라메스와렌 싱가포르 사회과학대 연구원은 “(10여 년 전부터) 싱가포르인들은 대중교통, 의료 과밀화, 정체된 임금의 배경에 정부의 자유주의 이민 정책이 있다고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민주당의 ‘외국 인력 규제’ 공약이 현실로 이뤄지긴 쉽지 않다. 싱가포르는 1965년 독립 이후 59년간 인민행동당(PAP)이 집권해 온 사실상 일당독재 국가다. 총선을 치를 때마다 의석의 90%를 싹쓸이한다. 이번 총선에서도 민주당이 제1당에 오를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만 싱가포르 국민 내에서 불만 목소리가 이어지는 만큼 야당이 이를 무기 삼아 집권당을 압박할 여지가 크다. 싱가포르 CNA는 “2020년 총선 당시 인민행동당이 독립 이후 야당에 가장 많은 의석을 내준 것은 외국인 노동자 증가에 대한 내국인들의 위기 의식과 역차별 관련 불만이 표심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20년간 싱가포르를 이끌었던 리셴룽 전 총리도 지난달 퇴임 직전 영국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외국 노동력 유치와 (이에 따른) 사회적 결속 사이 ‘내재된 긴장’을 다루는 것이 (재임 기간) 가장 어려웠던 문제”라고 밝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