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는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물줄기를 바꾸는 특종을 했다. 88올림픽 직후 이른바 '5공 청산'의 물꼬가 터진 시기에도 그랬다. 한국일보는 국회 청문회를 앞두고 1980년 당시 신군부가 주도한 언론통폐합의 흑막을 파헤쳤다.
한국일보는 1988년 10월 21일부터 20회에 걸쳐 연재, 5공화국에서 금기시됐던 언론통폐합 문제를 처음으로 공식 제기했다. 당시 기획은 중견기자들로 구성된 특별취재반이 취재와 기사 작성을 전담했다. 특히 이성준 사회부장이 입수한 ‘언론건전육성 종합방안보고’ 자료는 1980년 언론통폐합 조치의 진상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한국일보의 '언론건전육성 종합방안보고'가 폭로되기 전까지, 허문도 등 7명의 증인은 '1980년 자행됐던 통폐합 조치는 순수 목적에 따라 이뤄졌다'는 취지의 주장을 반복했다. 허씨는 국회 증언에서 “언론통폐합은 (개혁조치의 일환으로) 내가 입안했다”고 주장했다. 많은 언론이 허씨의 증언을 ‘언론 학살 공박에 개혁 강변’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한국일보를 통해 진실이 공개되면서 여론은 5공 청산으로 기울었다. 한국일보 입수 자료를 통해 언론통폐합 조치가 5공의 ‘저항세력’ 제거 조치였다는 점이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일보는 25일자 ‘언론통폐합 우격다짐’이라는 사설에서 허씨 증언의 모순점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조속히 언론청문회를 열어 언론 통폐합의 진상을 밝힐 것을 촉구했다.
한국일보 보도를 시작으로 각 매체도 언론통폐합 문제를 연일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결국 노태우 정부도 진상규명 여론을 일부나마 수용하게 됐다. 당시 정부 대변인 정한모 문공부 장관은 10월 28일 국회답변에서 “80년도 언론통폐합 조치는 당시 상황이 어쨌건 간에 무리하게 추진된 불행한 일”이라며 정부 잘못을 사실상 시인했다. 한국일보는 이에 맞춰 29일자에 ‘5공비리 척결 본격 작업’이라는 제목의 1면 머리기사를 내보냈다. 88올림픽 이후 대한민국은 본격적인 민주화로 진행하기 위한 5공청산에 돌입했는데, 그 과정에서 한국일보가 주도적 역할을 한 셈이다.
한편 한국일보는 1980년 언론통폐합의 역사적 중요성을 감안해 당시 국회 청문회의 속기록 전문을 게재하는 등 진실 규명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