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물로 어떤 게 괜찮을까요?"
드라마 소재를 고민하던 오수진 작가는 친분이 있던 김은희 작가를 만나 이렇게 물었다. 때는 2018년. 김 작가의 남편이자 감독인 장항준의 연출부에서 20여 년 동안 일한 그는 작가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다.
"소재가 남은 게 별로 없죠, 교통사고 말고는." 김 작가의 말을 듣는 순간 오 작가의 머리엔 번쩍하고 불꽃이 튀었다. 그는 교통사고 범죄 수사물 기획을 마음먹고 사례를 찾기 시작했다. 수사 연구 전문지가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국회도서관에서 자료를 뒤적였고 경찰서도 찾아갔다. 자료 조사 과정에서 한 사건이 그의 가슴에 콕 박혔다. 2007~2008년 충남에서 잇따라 벌어진 '할머니 교통사고 사망 사건'이었다.
사건의 골자는 이랬다. 남성 김모씨가 1년 반 동안 연속으로 교통사고를 냈는데 공교롭게 피해자는 모두 60대 후반~70대 중반 여성이었다. 김씨는 "광고 전단을 붙이려고 가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도로에서 할머니가 눈에 띄었다"며 사고 때마다 불가항력이었다는 식으로 진술했고, 보험사로부터 총 1억 원의 형사 합의 지원금을 타 냈다. 그중 유족에게 준 합의금은 2,000만 원에 불과했다.
"형사 합의 지원금을 받기 위해 교통사고를 일부러 낸 사건이었어요. 논밭 근처 등 인적이 드문 도로에서 힘없는 노인들만 골라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에 화가 치밀었죠. 사고 후 상대적으로 유족과 합의가 쉬울 거라 판단한 거니까요. 보험사기 특별조사관이 이 사건들을 서울의 한 경찰서 강력팀장에게 제보하면서 범죄의 실체가 드러났죠. 대본을 쓸 때 꼭 첫 회 에피소드로 다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고요." 11일 한국일보와 전화로 만난 오 작가의 말이다.
지난달 방송된 ENA 드라마 '크래시' 1, 2화에서 다룬 '노인만 노린 교통사고 범죄'는 이렇게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국내 첫 교통범죄 수사극인 '크래시'는 보복 운전이나 고라니처럼 갑자기 튀어나와 안전을 위협하는 전동킥보드 이용자 '킥라니' 등 현실 속 문제를 추리물처럼 다룬다. 극 중 곽선영, 이민기 등으로 구성된 교통범죄수사팀(TCI·Traffic Crime Investigation) 이름도 2013년 서울경찰청에 생긴 팀 이름에서 그대로 따왔다. ①일상 곳곳에서 벌어진 교통사고 범죄를 다뤄 공감을 사고 ②남자 선배가 수사를 주도하는 범죄수사물 속 남녀 주인공의 전형적인 성역할을 홀라당 뒤집어 통쾌함을 주면서 드라마는 시청자의 입소문을 타고 있다. 1회에 2.2%였던 시청률은 10회 6.3%로 뛰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17.5%·2022)에 이어 ENA 채널 역대 두 번째로 높은 기록으로, 최근 화제를 모은 tvN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최고 시청률(5.8%)보다 높은 수치다.
여러 방송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크래시'는 방송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남자 주인공 섭외가 난관이었다. 머리 회전은 빠르지만 사회성이 떨어지고 체력이 약해 범인도 놓치는 등 극 중반까지 유약한 모습으로 나오는 탓에 여러 남자 배우가 주인공인 차연호 역 제안을 고사했다. 기획 의도를 보고 이 드라마에 관심을 보인 한 지상파 방송사는 주연 배우 캐스팅을 두고 제작사와 의견 차이로 편성을 포기했다. '크래시'가 ENA에서 방송되기까지 6년 넘게 걸린 배경이다. 이런 제작 과정을 고려하면 흥행 반전이다.
K콘텐츠 시장에선 '크래시'처럼 교통사고 범죄를 소재로 한 콘텐츠들이 잇따라 제작되고 있다. 한문철 변호사가 교통사고 범죄와 관련 갈등을 다룬 콘텐츠를 유튜브 채널에 공개해 인기를 끌자 JTBC는 그 포맷을 활용해 '한블리'란 프로그램을 단독 편성했고, SBS는 '맨 인 블랙박스'를 내보내고 있다. 극장엔 일찌감치 '뺑소니 전담반'을 소재로 한 영화('뺑반'·2019)까지 걸렸다. 그간 K콘텐츠 시장에서 '살인의 추억'(2003)·'추격자'(2008) 등 잔혹한 연쇄 살인 사건이 장르 드라마와 영화 소재로 주로 활용됐고, 교통사고 범죄는 전면에 다뤄진 적이 거의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새로운 흐름이다.
교통사고 소재는 새삼 왜 주목받을까. '크래시'의 오 작가는 교통사고 범죄를 소재로 대본을 쓴 이유에 대해 "우리 모두가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교통사고 범죄는 사이코패스 범죄와 달리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생활밀착형 불의'라 시청자 몰입을 상대적으로 쉬 이끌 수 있다는 게 강점으로 꼽힌다.
일상 속 공정에 대한 요구가 커진 사회적 분위기도 한몫했다. 김헌식 중원대 사회문화대 교수는 "민생 문제에 대한 불만이 커진 시청자가 교통 법규 위반 판정 등에 적극 참여하고 처벌 과정까지 지켜보며 '일상 속 정의구현'을 대리만족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가수 김호중 음주 뺑소니 사건'을 향한 사회적 공분에서 엿볼 수 있듯 교통사고 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예전과 달리 부쩍 커졌다"며 "중대 범죄로 인식이 바뀌는 와중에 교통사고가 때론 사고로 위장된 권력형 비리와도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콘텐츠 소재로 자주 쓰이는 것"이라고 흐름을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