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는 1758년부터 80년 동안 대외 무역항을 하나만 열었다. 아편전쟁 패배 후 다섯 곳을 개항하기 전까지 일구통상(一口通商) 정책이었다. 외국 무역선은 홍콩과 마카오 사이 주강 하류를 약 100㎞를 거슬러 진입한 후 광저우의 부두에 도착했다. 지금의 황포고항(黄埔古港)이다. 광저우 역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타면 1시간 걸린다.
주강 지류 안쪽에 세로 100m, 가로 200m의 나루터 공간이 보인다. 사자 한 쌍이 문을 지키고 있는 월해제일관(粵海第一關)이 있다. 세관을 해관이라 한다. 광둥 최초의 세관이다. 해상 실크로드의 거점이라 소개하고 있다. 2021년 유네스코가 푸젠성 취엔저우(泉州)에 있는 송나라와 원나라 시대 해상무역 유적지 22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그중 하나가 세관이던 시박사(市舶司)다. 황포고항도 해상무역의 요충지였다.
나루터에 돛단배 한 척이 정박해 있다. 700년 전 원나라의 활활진 공주가 페르시아로 시집갈 때 탔던 배다. 옛날 배는 아니고 모방선이다.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와 훌라구는 원나라와 일한국(伊利汗國)의 창립자다. 활활진은 훌라구 손자인 4대 칸 아르군의 부인으로 낙점됐다. 1년 반이나 걸려 도착하니 예비 남편은 이미 사망했다. 그의 아들이자 7대 칸이 되는 가잔과 혼례를 올렸다. 마르코폴로가 동행한 바닷길은 취엔저우에서 출발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홍보하기 위해 쿠웨이트를 출발해 1년 동안 28개국을 순회했다. 광저우에 도착 후 정박 중이다.
건너편에 공원이 있다. 마치 예술품처럼 멋진 함선이 조각돼 있다. 스웨덴 국적의 구텐베르크호다. 두 나라 해상무역의 상징이다. 아편 장사에 몰두한 영국의 만행과 자주 비교된다. 1745년 1월 차와 비단을 가득 싣고 광저우를 출항해 8개월 만에 스웨덴 앞바다에 도착했다. 3번째 원양 항해였다. 항구를 불과 900m 앞두고 암초를 만나 침몰했다. 눈 빠지게 기다린 가족 모두 경악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고 차와 비단 일부도 건졌다. 새로 건조한 배로 261년이 흐른 2006년 7월 광저우에 도착했다. 스웨덴 국왕과 왕후도 황포고항을 찾아 제막식에 참여했다.
고촌 입구에 고항유풍(古港遺風) 패방이 있다. 단정하면서도 고운 필체다. 11세기 북송 시대 갯벌 위에 조성된 천년 고촌이다. ‘사대양에서 불어오는 뇌우 머금은 태풍의 눈이 봉포에 다다르니(四海雲牆臨鳳浦), 오대주의 장사치가 신주에 모두 모이네(五洲商旅匯神州)’. 양쪽 기둥에 적힌 글귀다. 우리와 달리 사대양 오대주라 한다. 신주는 중국, 봉포는 황포의 옛 이름이다.
80m 정도 들어가니 왼쪽에 해방동약(海傍東約) 골목이 보인다. 함풍 4년인 1854년에 썼다. 외국 선원의 행동을 제약하고 주민의 소요를 금지한 규정이다. 외국 선원이 마음 놓고 생필품을 구하거나 선박을 수선하던 공간이다. 목공소와 옻칠 가게, 식품점이 많았다. 무역이 활발했으니 번화한 만큼 말썽도 꽤 있었던 듯하다.
봉황이 날아와 머물다 갔다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인지 가문이 번창하고 오곡이 풍부했다. 번성을 이루니 봉황이 날아왔는지도 모른다. 강어귀를 포(浦)라 하고 강 안에 생긴 뭍은 주(洲)다. 지형 때문에 봉포(鳳浦)와 황주(凰洲)로 두루 불렸다. 9m 넘는 담장과 누각은 회사(灰砂)와 진흙, 굴껍데기로 지었다. 중앙에 쓴 봉포라 더 알려졌다. 외국 상선이 들락거리면서 서툰 중국어로 자꾸 ‘황포(WHAMPOA)’라 했다.
도랑이 잔잔하다. 북송 시대 주민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8개의 연못이 군데군데 형성돼 민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천자문의 천지현황우주홍황(天地玄黃宇宙洪荒)을 빌렸다. 천자당(天字塘)처럼 모두 불렀다. 둔덕마다 여지(박과의 한해살이풀)를 많이 심었다. 꽃이 만발하게 피면 마치 흰 뱀이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모양이 3㎞나 이어졌다. 우주은사(宇宙銀蛇)라 부르며 환호했다. 연못과 꽃이 만든 광경을 상상하니 황홀하다. 지금은 대부분 평지가 됐다.
무역항을 무대로 부를 축적한 상인이 거주했다. 조상을 숭배하는 사당도 많다. 청나라 시대 건축 양식으로 모두 14좌다. 집안이나 마을에도 서열이 있듯 사당도 그렇다. 4대 종사가 유명하다. 호(胡), 나(羅), 양(梁), 풍(馮)이다. 과거를 통해 관리를 배출하고 나라에 기여한 인물도 많다. 사당마다 문신이 그려져 있다. 열려 있으면 숨고 닫혀 있으면 보인다. 풍씨종사 신위에 걸린 상개봉포(祥開鳳浦)가 또렷하다. 조상 은공으로 상서로운 기운이 마을을 발전시켜 왔다고 믿는다.
1924년 6월 16일 중국국민당이 육군군관학교를 개교했다. 장주도(長洲島) 북쪽 강변이 황포다. 보통 황포군관학교라 한다. 황포고항에서 동쪽으로 10㎞ 정도 떨어져 있다. 문 앞에 사람들이 북적인다. 1938년 일본 비행기가 학교를 폭파했다. 1984년에 다시 건립했다. 군관학교 제1기 출신으로 국방부장관을 역임한 쉬샹첸이 교명을 썼다. 1996년 원래 위치와 규모, 모양 그대로 중건했다. 간판은 그대로다.
먼저 관리부 건물이 나온다. 학교는 2층이다. 오른쪽과 왼쪽, 가운데로 복도가 있다. 교실과 기숙사를 합쳐 모두 11개의 건물이다. 복도와 마당이 널찍해 학생들 활동이 여유롭고 활발했다. 엄혹한 항일전쟁의 와중이었다. 가운데 통로에 있는 대화청(大花廳)에서 주간 정치교육과 특별강연이 열렸다. 양쪽에 하화지(荷花池)가 있어 옹기종기 모여 토론하거나 휴식했다. 강물이 수시로 붓다 줄다 하며 수위를 유지했다. 여름이면 연꽃이 만개했다.
용도가 궁금한 나무 통이 있다. 친절하게 설명이 있다. 개교 초기에 상수도가 없었다. 관리부가 짐꾼 40여 명을 고용해 새벽부터 강변 물을 공수해 통에 담았다. 교관과 학생의 생활용수를 해결했다. 소방에도 대비했다. 태평통(太平桶)이라 불렀다. 군사훈련이나 전쟁도 물 없으면 총알 없는 총이나 마찬가지다. 난세의 학교였어도 태평을 언급할 정도의 위트는 있었다.
개교일에 맞춰 쑨원이 부인 쑹칭링과 함께 함선을 타고 부두에 도착했다. 모두 나와 환영했다. 교관과 학생, 소련 군사고문단, 국민당과 공산당 당원 등 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개교 행사가 열렸다. 당기와 교기를 향해 허리 굽혀 세 번 절했다. 총리 쑨원에게도 세 번 굽혔다.
정치부 교관 후한민이 총리 훈화를 대신 낭독했다. 전시 자료실에 초상화와 함께 적혀 있다. ‘삼민주의는 우리 당의 근본(三民主義, 吾黨所宗)'이란 말로 시작해 '한마음 한 뜻으로 한결같이 관철하라(一心一德, 貫徹始終)’는 말로 맺는다. 중화민국 국가 가사로 사용하고 있다. 타이완에 가서 국가를 듣게 되면 귀담아 들어 보기 바란다.
제1기에 645명을 배출했다. 제5기 이후 난징에서도 학교를 운영했다. 제8기부터 우한에 분교를 설립한다. 일본군과의 전세가 영향을 미쳤다. 제4기 학생 2,768명의 지역별 분포가 재미있다. 가까운 광둥이 260명으로 가장 많다. 민국 시대 북방 지명인 펑톈(奉天), 쑤이위엔(綏遠), 러허(熱河), 차하르(察哈尔) 출신도 보인다. 한국 출신도 23명이나 된다. 보병과 16명, 공병과 1명, 정치과 6명이다. 군관학교 출신 대부분은 전투 중 사망했다. 명단에 최림(崔林)이 있다. 밀양 출신으로 조선의용대를 조직한 항일 독립운동가다. 월북 후 숙청된 김원봉의 가명이다.
1926년 10월에 제4기가 졸업했다. 보병과 리바오위의 졸업증서가 전시돼 있다. 상단에 쑨원의 사진이 있다. 쑨원은 황포군관학교 개교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간암으로 사망한다. 임종 전에 세 부의 유서를 남긴다. 부인 쑹칭링에게 옷과 서적, 주택 등을 넘긴다는 가사유촉(家事遺囑), 소련과 연합해 나라의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신념을 담은 영문 편지 치소련유서(致蘇聯遺書)와 함께 국사유촉(國事遺囑)이다. 증서 상단에 국사유촉을 깨알같이 적었다.
교장 장제스와 당 대표 왕자오밍 이름으로 수여했다. 나중에 매국노로 취급된 왕징웨이다. 공산당 입장에서 보면 둘 다 똑같다. 소련과 연합하고 공산당과 합작해 자유민주주의공화국을 건립하길 바란 쑨원의 유지는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한 줌 재로 사라져 버렸다.
쑨원은 군정부장 출신 청첸을 교장으로 내정한다. 장제스는 줄기찬 험담으로 불만을 표시하고 다녔다. 원로들의 설득에 결국 장제스를 교장에 임명한다. 정치 야욕이 컸던 36세의 장제스였다. 당시 영상을 보면 혼자 말에 올라타고 군대 분열을 지휘한다. 교장 직책은 훌륭한 발판이었다. 국민당으로 영입한 학생들은 든든한 참모가 됐고 전투력과 정치권력의 기반이 된다. 집무실 벽면에 제1기 학생 명록이 붙어 있다.
교장회객청(校長會客廳)이 있다. 손님을 맞이하거나 교관이 집합하는 장소다. 한쪽 구석에 표구가 보인다. 민국 시대 4대 서예가인 위여우런에게 받은 글씨다. 너무 기뻐서 당장 회의실에 걸었다. '등고망원해(登高望遠海), 입마정중원(立馬定中原)'이다. 높이 올라 먼바다 바라보고 말을 세워 중원을 안정시키라는 뜻이다. 당장 통일을 이루라는 메시지다. 장제스는 곧 광폭의 행보를 보인다. 국공합작을 파괴하고 공산당을 때려잡는 데에 혈안이 된다. 쑨원의 못다 이룬 꿈은 후계를 잘못 둔 탓이다.
군사 훈련만큼이나 정치교육이 중요했다. 국민당 주도로 설립했으나 공산당과 합작 기간이었다. 공산당 저우언라이도 정치부 교관으로 참여했다. 국민당 출신의 주임이 한 달 만에 사임하고 후임자는 능력부족으로 교체됐다. 자연스레 주임이 됐다. 국민당 교장과 공산당 정치부 주임의 학생 끌어안기가 치열했다. 잠재력 있는 인재를 알아보고 자기편으로 만드는 일이 두 당의 숙명이었다. 전우애와 경쟁심이 학풍이었다.
99주년 행사 포스터가 보인다. 친애정성(親愛精誠)은 군관학교의 교훈이었다. 동지를 사랑하고 깊이 연마하며 성심성의를 다하라는 뜻이다. 아래에 쓴 단결분투(團結奮鬥)는 현대의 냄새가 난다. 그러고보니 올해가 100주년이다. 학생 단체 관람객이 많아 시끄럽고 복잡하다. 자료실이나 교실을 따라다니며 설명을 듣고 필기도 한다. 눈길만 주고 딴청을 피우는 학생도 있다. 건국에 혁혁한 공로를 끼친 인물 중에 군관학교 출신이 수두룩하다. 피 흘리며 이름 없이 죽어간 인물은 더더욱 많다. 참관한 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