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장수군은 전체 면적의 75%가 산지다. 해발 1,000m 넘는 장안산과 팔봉산을 비롯해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인 이 지방 소도시를 찾는 외국인들이 늘고 있다. 유명 가수 공연이나 대규모 축제도 아닌 산, 숲길 등 자연 속을 달리기 위해서다. 2022년 첫 산악 마라톤 대회(트레일레이스)에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7개국 200명이 방문했다. 이후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더니 지난해 두 번째 대회는 8개국 900명, 올해 4월 세 번째 대회는 14개국 1,500명이 찾았다. 오는 9월 열리는 네 번째 대회에서는 각국에서 온 마라토너 2,200명이 장수군 일대를 달릴 예정이다.
2만983명. 지난해 기준 장수군 인구다. 해마다 감소 추세를 보이면서 현재 전국에서 네 번째, 도내 14개 시·군 중에서는 인구가 가장 적다. 인구 감소 원인은 역시 저조한 출산율과 청년 인구 이탈이다. 장수에는 대학이 없다 보니 초·중·고를 졸업한 10대 청소년들은 전주 등 타 지역으로 떠난다.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은 취업을 위해 또다시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인구감소지역으로 분류된 지역이 공통으로 안고 있는 숙제다. 출산율을 높이거나 정주인구를 늘리기 위한 뾰족한 대책을 찾기 어려운 점도 마찬가지다. 각 지자체는 '생활 인구' 유입과 관광객 유치 등을 통해 돌파구를 찾고 있다. 장수군 역시 주요 관광지 활성화를 통해 장수 알리기에 힘쓰고 있다. 장수는 논개사당 의암사와 논개 생가, 와룡자연휴양림, 뜬봉샘생태공원, 장수누리파크 등이 대표 관광지로 꼽힌다. 특히 가을이 되면 억새 군락으로 유명한 장안산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방문객이 몰린다. 군에 따르면 주요 관광지점 총 입장객 수는 2020년 24만2,791명, 2021년 24만5,668명,2022년 30만5,025명, 2023년 38만6,388명으로 해마다 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관광객 늘리기만으로 지방소멸을 극복하기에는 한계도 분명하다.
이런 가운데 장수 트레일레이스가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국내뿐 아니라 일본, 미국, 프랑스, 아랍에미리트 등 세계 각국에서 한국으로 날아온 외국인들이 수도 '서울'이 아닌 '장수'에서 추억을 쌓고 있어서다. 대회에 참가한 외국인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유튜브 등에 후기를 올리며 서투른 발음으로 '전라북도 장수'를 연신 외친다. 캐나다 국적 앤드루는 지난 4월 제3회 트레일레이스에 참가한 뒤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장수는 도시보다는 시골마을"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도시에서 달릴 때 보지 못했던 멋진 풍경이 기다리고 있었고 주민들의 환대에 감동했다"고 전했다.
장수 트레일레이스는 2020년 12월 귀촌한 김영록(32) 러닝크루 대표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매년 각국 산악 마라톤에 참가할 정도로 달리기 마니아인 김 대표는 산지가 많은 장수의 특성에 착상, 대회 개최지로 손색이 없다는 생각에 대회를 기획했다. 러닝크루는 김 대표 주도로 2021년 조직된 장수군의 20~40대 청년 단체로 교사, 회사원, 소방관, 농부 등 다양한 직업의 청년들이 참가하고 있다. 매주 화요일에 달리기를 하면서 지역민과 소통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발굴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최대 30명이 모일 때도 있다.
김 대표가 꿈궜던 산악마라톤 대회는 1년 만에 현실이 됐다. 2021년 장수지역활력센터 주민제안 공모사업, 2022년 행정안전부 청년공동체 활성화 사업 등에 잇따라 러닝크루가 선정되면서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을 받게 됐다. 그 과정에서 플로깅(조깅하며 쓰레기 줍기), 마을 달리기, 어린이 마라톤 대회 등 크고 작은 행사를 열었고, 2022년 9월 첫 대회를 개최했다.
김 대표는 장수의 주요 관광지를 둘러볼 수 있는 장거리 코스를 개발하는 데 공을 들였다. 서울, 제주, 울주, 강릉 등 국내에서 이미 대규모 트레일러닝 대회가 자리 잡은 지 오래였기 때문에 장수만의 특색을 살리는 게 필요했다. 그는 매일 지역 명소를 돌며 코스를 짰다. 물과 에너지 보급품을 지급하는 CP(체크포인트) 장소와 참가자들이 현재 위치를 알 수 있는 안내판을 설치할 만한 장소도 물색했다. 그렇게 김 대표 손에서 승마로드(9㎞), 팔공산(해발 1,153m), 장안산(해발 1,237m), 동촌리 고분군, 뜬봉샘 등을 경유할 수 있는 20Km, 38Km, 70Km, 100Km 코스가 탄생했다.
김 대표는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지역 주민과 어우러지는 대회를 만들기로 했다. 그는 7개 읍·면 주민들을 일일이 만나 트레일레이스에 대해 설명하며 보급소 마련 등 대회 진행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냉랭한 반응이었다. 외부인들이 집 앞에서 북적이는 것을 내키지 않아 했고 혹시나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포기하지 않고 틈날 때마다 주민들을 만나 설득했다.
막상 대회가 열리고 난 후 누구보다 주민들은 참가자들을 환영했다. 벨을 흔들며 열띤 응원을 이어갔고 보급소에서 각종 간식은 물론 직접 만든 주먹밥과 콩나물국을 준비해 무료로 나눠주었다. 중·고교생 등 주민 80여 명도 자원봉사자로 참여해 일손을 도왔다. 코스별로 최소 2시간에서 최대 11시간까지 걸려 완주한 참가자들은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지만 얼굴엔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대회 기간 동안 지역 모든 식당은 만석이 됐고, 숙박업소도 만실을 이뤘다.
장수 트레일레이스 개최 후 가장 만족도가 높은 이들은 주민이다. 대회를 연 이후 방문객 연령층이 다양해져서다. 그동안 도내 또는 인근 지역의 중·장년층이 주로 장수를 방문했다면 요즘에는 20, 30대 등 젊은 세대는 물론 외국인의 방문 횟수가 늘었다고 한다. 전진(36) 장수사과빵 대표는 "대회 참가자들이 대회 당일에만 오는 게 아니라 코스를 미리 읽히려고 장수에 여러 차례 방문한다"며 "대회 기간에는 참가자들을 위해 할인 이벤트도 하는 데도 평소보다 매출이 2배 이상 오른다"고 흡족해했다. 장수누리파크캠핑장을 운영하는 김영서(60) 대표도 "대회가 열리면 참가자들에게 지역을 알릴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아 기쁘다"며 "트레일레이스 기간에는 참가자들이 하룻밤 묵고 가려고 해도 방이 없어서 돌아가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장수군은 트레일레이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만큼 인프라 확충에 힘쓰고 있다. 최훈식 군수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참가자들이 장수에 더 머물게 함으로써 경제적인 효과를 창출해내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며 "트레일레이스를 통해 장수군을 한국의 샤모니(프랑스 동남부 오트 사부아 주에 위치한 산악 마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산악 마라톤 대회 UTMB의 출발지), 산악 관광의 메카로 만들어 장기적으로 지방소멸 위기를 극복해 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