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물가 호언에 없는 것

입력
2024.06.12 04:30
27면

'마을은 한눈에 봐도 움푹 꺼져 있었다. 집들로부터 6m 정도 떨어진 바다는 기다란 제방 아래 넘실댔다. 해수면은 마을이 들어선 땅보다 족히 2m는 높아 보였다. 제방이 없다면 마을은 벌써 바다의 일부가 됐을 것이다. 마을 앞에도 성인 키를 훌쩍 넘는 높이 2m 남짓 둑이 있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공사한 흔적이 퇴적층처럼 선명했다.'

2021년 8월 찾아간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북부의 플루이트(Pluit) 지역 풍경이다. 인도네시아가 올해 독립기념일(8.17)에 맞춰 칼리만탄(보르네오)섬으로 천도한다는 얼마 전 보도가 기억을 소환했다. 당시 취재는 "10년 안에 인도네시아는 수도가 물속에 잠길 것"이라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기후변화 관련 경고성 발언을 실증하려는 목적이었다.

주민들은 증언했다. "해수면은 높아지고 지반은 낮아져 세 차례 큰 공사 이후에도 벽을 계속 쌓아올리고 있다, 지금도." "20년째 살고 있는데 지반이 적어도 1m 이상은 내려앉았다." 2030년 대통령궁 등이 물에 잠긴 자카르타 도심을 붉게 칠한 해외 연구기구의 예측 지도보다 실감 났다.

각성한 의식은 2016년 미국 알래스카주 밸디즈(Valdez)에서 마주했던 12마일(19.3㎞) 길이가 녹았다는, 바래고 쪼그라든 워싱턴빙하의 안위마저 근심하기에 이르렀다. "누구나 다 지구를 보존하는 건 원하지만, 아무도 엄마의 설거지를 돕겠다는 사람은 없다"(P. J. 오루크)고 했던가. 한국일보 기후대응팀 기사에 공감하며 의지를 다졌으나 알량한 실천은 서서히 시들었다.

살림살이가 팍팍해진 뒤에야 기후변화는 일상의 위협이 된 모양새다. 농수산물 가격 급등이 밀어 올린 장바구니 물가는 좀체 떨어지지 않는다. "몇백억 원 정도만 투입해 할인 지원하고 수입품 할당관세를 잘 운영하면 잡을 수 있다"는 대통령의 호언도, "올해 작황은 괜찮을 것"이라는 장관의 예언도 감흥이 없다. 되레 국민 10명 중 9명(89.9%)이 "기후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답했다는 기상청 조사가 눈에 박힌다. 오징어도 사과도 사라지는 기후변화를 고물가로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올리브, 코코아, 원두, 설탕 등의 국제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는 게 최근 뉴스다. '비싸면 수입하면 된다'는 발상이 통하지 않을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바야흐로 기후변화로 농작물 생산이 감소해 먹거리 물가가 오르는 '기후플레이션(기후+인플레이션)'을 목도하고 있다.

유럽의 포츠담기후영향연구소(PIK)와 유럽중앙은행(ECB)은 2035년 기후플레이션으로 식품 물가가 최대 3.2%포인트, 전체 물가는 최대 1.2%포인트 오른다고 전망한다. 2050년 기후변화로 인한 전 세계 피해액은 연간 19조~59조 달러(약 2경6,176조~8경1,284조 원)에 달한다고 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기후변화 시대엔 통화정책만으로 물가 안정을 달성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기후가 곧 경제인 세상이 도래하고 있는 셈이다.

독일은 영국, 네덜란드에 이어 2021년 '경제기후부'를 신설했다. 당시 장관의 설명은 이렇다. "산업 구조 등 굵직한 변화가 잇따른다. 권위적인 방식으로 진행할 일이 아니다. 사회를 설득하는 게 중요하다." 미래 세대를 위해 시대정신을 읽고 공유하며 소통하는 지도자가 우리에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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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찬유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