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됐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시인들에게도 장마는 달갑잖았던 듯싶다. "비는 하염없이 마당귀에 서서 머뭇거리고/ 툇마루에 앉아있으니 습습하다. / 목깃 터는 비둘기 울음 습습하다. / 어둑신한 헛간 냄새 습습하다. / 거미란 놈이 자꾸 길게 처져 내렸다/ 제자리로 또 무겁게 기어 올라간다(하략)" 문인수의 '장마'에선 냄새도 소리도 장면도 축축하게 느껴진다. “7월 장마 비오는 세상/ 다 함께 기죽은 표정들/ 아예 새도 날지 않는다”라고 읊은 천상병의 '장마'엔 시인의 한숨 소리가 담겼다.
장마는 우리말이다. 16세기 문헌에 나오는 ‘댱마ㅎ’가 어원이다. ‘댱’은 길다는 뜻이고, ‘마ㅎ’는 비를 의미한다. 여러 날 계속되는 비로, 보통 이맘때가 장마철이다. 사계절 틈새에 계절 하나가 더 있다는 생각에, 장마에 철을 붙였을 게다. 예전 장마철엔 우산 쟁탈전이 치열했다. 살이 한두 개 부러지거나 찢어진 우산이라도 일찍 집을 나서야 차지할 수 있었다. 그 시절엔 골목골목 다니며 "우산 고쳐요"라고 외치는 사람이 반가웠다.
끈적끈적한 더위는 참기 힘들다. 무더위, 찜통더위, 가마솥더위가 '습한' 더위다. 무더위는 ‘물’과 ‘더위’가 어울렸다. ‘물더위’에서 ‘ㄹ’이 탈락해 무더위가 됐다. 찜통더위는 찜통에 물을 끓일 때 나는 뜨거운 김을 쐬는 것처럼 뜨겁고 습한 더위다. 최악은 가마솥더위다. 물이 펄펄 끓어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가마솥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마른' 더위는 강더위다. 비가 내리지 않고 볕만 뜨겁게 내리쬐는 더위다. 강더위의 ‘강-’은 한자어 강(强)이 아니라 우리말이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으면서 매섭게 추운 강추위, 강서리(늦가을에 내리는 된서리), 강기침(마른기침) 등의 ‘강’도 모두 ‘물기 없이 마른’의 의미를 더한다. 강더위보다 더 뜨거운 건 불더위, 불볕더위다. 된더위, 한더위도 선풍기나 부채로는 떨칠 수 없는 더위다.
한자어 폭염, 폭서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우리말 무더위, 찜통더위, 가마솥더위, 강더위, 불더위, 불볕더위, 된더위, 한더위는 모두 한 단어이므로 붙여 써야 한다.
오란비. 장마를 일컫는 우리 옛말이다. 오래를 뜻하는 고유어 ‘오란’과 물을 뜻하는 ‘비’가 만났다. 말맛이 고와서일까. 오란비는 능소화 꽃만 활짝 피울 뿐, 홍수 피해를 내진 않을 것 같다. 오란비가 이름값을 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