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델타동이 뭐야" vs "우리가 좋다는데"… 외국어 지명 허용해야 할까?

입력
2024.06.10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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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강서구, 외국어 명칭 추진에
정부 불승인, 법정동에 전례 없어 
공공성·재산권 충족할 방안 필요

부산 강서구가 신도시에 외국어로 된 법정동(에코델타동)을 붙이려다가 정부 제지로 무산됐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법정동 이름을 외국어로 바꾸는 시도였지만, 동명을 외국어로 써서야 되겠냐는 거부감을 넘지 못했다. 주민 입장에선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아파트값이 오르길 바라지만, 예쁜 우리말을 두고 굳이 외국어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만만치 않다.

부산 강서구는 강동동, 명지동, 대저2동 일대에 조성되는 에코델타시티(Eco Delta City)에 '환경'을 뜻하는 에코(eco)와 '삼각주'를 뜻하는 델타를 합친 '에코델타동(洞)' 설치를 추진했다. 이 이름은 주민들이 직접 선택한 동명이다. 지난해 10월 주민과 입주예정자를 상대로 한 선호도 조사를 실시했더니, 에코델타동(48%)이 가장 좋은 반응을 얻었다.

도로명 주소엔 이미 일상화

그러나 정부가 제동을 걸었다. 행정안전부는 3일 '국어기본법'과 강서구의 '국어진흥조례' 등에 맞지 않는다며 이 이름을 승인하지 않았다. 강서구 측은 에코델타동을 포함해 다른 대안을 검토한다는 방침이다.

행정구역 신설에는 행안부의 승인이 필요하다. 하지만 신설이 아닌 변경은 지방자치단체 조례만으로 가능하다. 이런 점을 활용해 행정구역에 외국어를 넣어보려는 시도는 과거에도 있었다. 2010년 대전 유성구는 대덕테크노밸리 일대 행정동 이름을 '관평테크노동'으로 변경했다. 기술산업단지로서 정체성을 담아야 한다는 주민 의견이 반영됐다. 하지만 지역명에 외국어를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여론에, 3개월여 만에 관평동으로 회귀했다.

동명이 아닌 도로명 주소에선 이미 외국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도로명 주소는 지자체가 결정할 수 있고, 로마자 표기만 준수하면 별다른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 인천에는 청라사파이어로, 크리스탈로가 있고, 부산에는 마린시티로, APEC로가 있다. 울산엔 모듈화산업로, 경기 수원시에 에듀타운로, 경북 봉화군에 파인토피아로, 충남 보령시에 머드로 등이 쓰인다. 경기 파주시 엘씨디(LG디스플레이)로, 광주 앰코(앰코테크놀로지)로처럼 영문 기업 이름을 딴 도로명도 있다.

정체불명 아파트 이름처럼 될라

외국어가 삶의 공간 이름에 침투한 현상은 신축 아파트 단지 이름을 보면 두드러진다. 과거에는 '반포 자이'처럼 지역명과 건설사 이름만 딴 아파트가 많았지만, 최근엔 외국어나 외래어가 붙지 않은 것을 찾기가 더 어렵다. 요즘은 영어뿐 아니라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심지어 라틴어를 조합한 국적불명 이름까지 붙기도 한다. 전남 나주시에는 국내에서 가장 긴 '광주전남 공동혁신도시 빛가람 대방엘리움 로열카운티'라는 단지가 있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아파트가 투자 개념이 돼버린 만큼, 부동산 가치 상승을 바라는 주민 의견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재개발 조합장도 "이름에 시공사나 주민 욕심이 들어가 있는 것은 맞다"면서도 "조합장은 조합원들의 의견을 따를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아파트 단지명은 개인 사유지라 주민들의 뜻대로 이름을 바꾸면 그만이지만, 외국어가 난무하는 아파트명은 역설적으로 공공 지명에서 어느 정도의 통제와 제한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온다. 동명이나 지명을 주민 뜻대로 바꾸도록 하면, 아파트 이름처럼 국적불명 외국식 표현이 넘쳐날 것이라는 지적이다.

한글 단체들은 일상 생활에서 이미 외국어 남용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지역명으로까지 이런 경향이 확산하는 현상을 우려하고 있다. 원광호 한국바른말연구원장은 "지역 명칭이나 아파트를 외국어로 한다고 해서 가치가 올라간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며 "한글의 우수성을 지키면서도 공공성과 재산권을 보장할 수 있는 대안 마련과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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