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의협)가 이달 18일 전면 휴진을 선언했다. 국내 모든 의사가 가입된 법정단체인 의협이 이번 의정갈등 국면에서 집단행동에 나서는 첫 사례다. 앞서 의대 교수단체들도 의협과 보조를 맞추기로 한 터라 휴진 참여율에 따라 대형 병원부터 동네 의원까지 국내 의료기관이 전면 셧다운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내년 의대 신입생 증원 절차가 마무리됐음에도 전공의와 의대생의 수련·수업 복귀 조짐은 없는 가운데 기성 의사들이 본격적으로 대정부 투쟁에 가세하면서 의정갈등 활로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의협은 9일 서울 용산구 의협 회관에서 전국의사대표자회의를 열고 "회원 투표 결과에 따라 오는 18일 전면 휴진하고 의대생·국민도 함께 참여하는 총궐기대회를 개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임현택 의협 회장은 "정부는 의사들 희생으로 겨우 유지한 고사 직전의 한국 의료를 사망으로 내몰았다"며 "14만 의사들이 정부와 여당에 회초리를 들고, 국민과 함께 잘못된 의료정책을 바로잡을 결정적 전기를 마련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의협이 지난 4~7일 투표권 보유 회원 11만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투표에선 '정부의 의료농단·교육농단을 저지하기 위한 의협의 강경 투쟁을 지지하는가'라는 질문에 90.6%, '의협이 6월 중 계획한 휴진을 포함하는 단체 행동에 참여하겠느냐'는 질문에 73.5%가 각각 찬성했다. 투표율은 63.3%였다. 임 회장은 "2000년 의약분업의 투쟁 열기를 뛰어넘는 압도적 참여와 의지를 재확인했다"고 자평했다. 18일 전면 휴진이 강행된다면 2000년(의약분업), 2014년(원격진료), 2020년(의대증원)에 이어 의협 차원의 네 번째 집단행동이다.
의협은 정부에 '내년 의대 증원 절차의 전면 중단’을 요구 조건으로 걸었다. 18일로 결행 날짜를 정한 이유는 전날 무기한 휴진에 돌입한다고 예고한 서울대병원과 발맞춰 대정부 압박을 강화하려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최안나 의협 대변인은 "18일 이후 집단행동 지속 여부는 정부의 반응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서울대 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 6일 전공의를 상대로 발령한 모든 행정명령을 취소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며 휴진을 결의했다. 김영태 서울대병원장이 휴진 불허 방침을 밝혔지만, 비대위는 이날 김 병원장에게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기대하지 말고 바람직한 의료체계를 실천해 전공의와 의대생이 복귀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달라"며 협조를 요청했다.
대표적 의대 교수단체들도 의협과 함께하기로 방침을 정한 상황이다. 국내 40개 의대가 모두 소속된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와 20개교가량이 참여한 전국의대교수비대위(전의비)는 이달 5일 의협, 대한의학회와 대표 연석회의를 갖고 의협을 중심으로 의대 증원 사태에 공동 대응하기로 의견을 모았고, 전의비는 7일 총회에서 "의협의 집단행동 방침을 따르겠다"고 결의했다. 대형병원에서 전공의가 빠져나간 공백을 메우고 있는 교수들이 휴진에 대거 동참한다면 필수·응급 의료체계 마비가 우려되는 상황이다.
전례로 볼 때 의협 집단행동의 파급력이 크지 않을 거란 전망도 적지 않다. 의협 주축을 이루는 개원가(의원급 개원의·봉직의)는 전체 의사의 40% 이상이 소속돼 인원은 많지만, 영업일수가 병원 수익과 직결되는 자영업자 성격이 강하다. 실제 2020년 의대 증원 추진 당시 의협이 집단휴진을 결의했을 때 개원의 참여율은 한 자릿수에 머물렀다.
의대 교수 역시 이번 의정갈등 국면에서 몇 차례 집단 휴진을 시도했지만 기존 진료·수술 예약, 대학·병원과의 관계, 여론 등을 의식하다 보니 참여율이 저조했다. 서울대 교수 비대위도 휴진 기간에도 매일 출근해 응급실과 중환자실 진료를 유지하겠다는 단서를 달았다.
의협 지도부가 '역대급 투표율'이라며 이번 투표 결과에 고무된 모습을 보이면서도 무기한이 아닌 하루짜리 휴진을 결정한 것도 투쟁 장기화에 대한 부담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날 현장에서는 "투표로 보여준 뜻이 18일 전체 휴진으로 나타나길 바란다"(최안나 대변인), "내가 아닌 남이 나서주길 바란다면 한국 의료의 미래는 절대 없다"(김교웅 대의원회 회장) 등 참여 독려 발언이 잦았다.
정부는 의협 결정을 비판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날 의료개혁 관련 브리핑을 열고 "일부 의료계 인사들과 의사단체가 국민 생명을 담보로 추가적인 불법 집단행동을 거론하고 있어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정부는 의료계를 막판까지 설득하겠다면서도 휴진이 현실화할 경우 법적 대응에 나설 뜻을 내비쳤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휴진율 자체는 중요한 게 아니며,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는 집단휴진은 절대 용납돼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복지부는 최근 언론 브리핑에서 "개원의들의 불법적 집단행동이 있다면 정부는 의료법 등에 따라 필요한 대처를 하겠다"(전병왕 보건의료실장)며 진료유지명령, 업무개시명령 발동 가능성을 시사했다.
환자단체들도 격한 반응을 보였다. 한국중증질환연합회는 이날 입장문을 내고 "의협 파업 선언은 국민 건강은 내팽개치고 집단이익만 추구하는 극단적 이기주의 행태"라며 "정부는 의사 불법파업을 국가 비상사태로 다스려 국가·국민 공동체를 온전히 보존해야 할 의무가 있다"며 강경 대응을 주문했다.
의협이 내년도 의대 증원까지 백지화하라며 정부가 받기 힘든 조건을 내걸고 집단행동을 벌이는 것을 두고 의료수가, 필수의료패키지 등 다른 대정부 협상 과제에서 협상력을 확보하려는 전략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임 회장은 이날 회의에서 "필수의료패키지가 의료를 망가뜨린다", "심평원이 제시하는 싸구려 진료 지침에 따라 진료할 것을 강요받아왔다"며 불만을 드러냈다.